[기업족쇄부터 풀어라] 상속세 최고세율 65%에 아예 승계 포기...'100년 기업 꿈' 꺾는다

<3> 징벌적 상속세
업황 악화 속 높은 세금 부담으로
외국계 사모펀드 등에 매각 잇따라
지분 팔아 충당하다 경영권 위협도
밀레, 제도 뒷받침에 장수기업 성장
국내 기업들도 3~4세 승계 본격화
창업정신 이어갈수 있게 개편 필요


기업 인수합병(M&A) 중개업체의 A 상무는 귀여운 캐릭터 모양을 한 USB를 목에 걸고 다닌다. 별로 값이 나갈 것 같지 않지만 8G 용량의 USB 안에는 난다 긴다 하는 국내 기업들의 M&A 대상 기업의 정보가 담겨 있다. 최근 들어 USB를 사용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상속세를 내느니 기업을 파는 게 낫다는 창업자들이 매물을 내놓으면서 A 상무는 업무로 눈코 뜰 새가 없다.

국내 기업의 평균 연령이 60세를 넘으며 3~4세 승계가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가업승계를 반기지만은 않는다. 업황 악화에다 무엇보다 상속세 부담이 겹치면서 사업을 아예 포기하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한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자동차 부품업이나 봉제업 등 업황이 최악인 산업군을 중심으로 상속세 부담감이 커지면서 매물이 나오는 추세”라며 “사업 시너지를 낼 만한 업체가 인수하면 다행이지만 외국계 사모펀드 등에 팔려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중소 건설자재 업체의 C 대표는 상속 계획을 짜다 회사를 매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장남에게 100억원 규모의 주식을 물려줄 경우 상속세만 14억원가량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찰 노릇이다. C 대표는 특히 회사 규모를 키울수록 상속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C 대표는 “수십 년 고생해 일궈온 기업을 자식에게 가업으로 승계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상속세가 ‘100년 기업의 꿈’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질세율이 최고 65%에 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인 한국의 기업인들은 천문학적인 세금을 내지 못해 경영권을 외국계 사모펀드에 매각하는가 하면, 상속세를 마련하다 지분율이 낮아져 경영권을 위협받기도 한다. 가업승계는 단순히 부(富)의 이전이 아니라 창업정신·노하우·투자계획 등 유무형의 자산을 100%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인 만큼 징벌적 상속세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 최고세율 65%…OECD 평균 26%의 두 배 이상=주식으로 기업승계를 할 경우 실제 상속세 부담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명목세율만 보면 OECD 국가 중 일본(55%)에 이어 한국(50%)이 두 번째지만 최대주주 주식에 할증(최대 30%)이 붙어 최대 65%까지 치솟기 때문이다. OECD 35개국 최고세율 평균인 26%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 최근 4세대 경영승계를 마친 LG그룹의 구광모 회장은 선대회장인 고(故) 구본무 회장의 ㈜LG 주식 8.8%를 물려받으며 7,200억원가량의 세금을 내게 됐다. 지분평가액 1조1,890억원에 20%를 가산한 1조4,268억원을 기준으로 50%의 상속세를 적용한 결과다. 20%의 할증세율은 지난 2000년부터 최대주주의 지분율에 따라 차등 적용됐다. 50% 이하면 20%, 50% 이상이면 30%를 할증 받는다. 더 많이 보유해 경영권을 확실히 쥐고 있는 기업일수록 할증률이 높은 셈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OECD 35개국 중 17곳은 직계비속 기업승계 시 상속세 부담이 없다. 나머지 18개국 중 10개국은 직계비속 기업승계 시 실질세율을 확 낮춰준다. 독일의 경우 50%인 명목 최고세율이 30%로 낮아지고 프랑스는 60%에서 45%로, 벨기에는 80%에서 30%로, 네덜란드는 40%에서 20%로 낮아진다. 영국·스페인·아일랜드 등에서는 직계비속 기업승계 시 30% 안팎의 공제혜택을 준다. 단순히 개인의 부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업 확대와 고용창출을 위한 작업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총의 한 관계자는 “독일·프랑스·벨기에에서는 세율 인하와 큰 폭의 공제혜택을 모두 준다”면서 “명목 최고세율이 50%인 독일의 실질세율은 4.5%로 떨어지고 60%에 달하는 프랑스 명목 최고세율도 11.25%로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30대 기업 중 28곳이 상속세 폭탄 예정…중견·중소기업도 마찬가지=상속세 부담을 던 기업들은 100년 이상 지속하며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쌓아나가고 있다. 프리미엄 가전 시장의 절대 강자인 독일 밀레가 대표적이다. 1899년 설립된 밀레는 120여년간 가족 경영을 고수하며 핵심 부품 기술력을 높여왔다. 라인하르트 친칸 밀레 회장은 “상속세 혜택을 주는 대신 고용창출을 비롯해 국가의 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 제도적 기반 덕분”이라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한국은행이 2011년 발표한 ‘일본의 기업승계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기준 200년 이상 장수한 독일 기업은 1,563개, 일본 기업은 3,113개에 달한다.

한국의 경우 상속세 부담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매각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니더스(고무의류 세계 1위)가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넘긴 것을 비롯해 락앤락(밀폐용기 제조 국내 1위), 쓰리쎄븐(손톱깎이 제조 세계 1위), 에이블씨엔씨(온라인 화장품 판매) 등이 경영권을 매각하거나 적자기업으로 전락했다. 최근에는 OCI 대표에 오른 이우현 사장이 2,000억원가량의 상속세 마련을 위해 보유 지분을 팔며 최대주주 지위를 내려놓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전반으로 확산할 예정이다. 30대 그룹 가운데 LG와 현대백화점을 제외하면 경영권과 지분 승계를 마무리한 곳은 드물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우 훗날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4.72%)의 절반 이상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8조~9조원으로 추정되는 상속세를 마련하려다 삼성가의 삼성전자 지분율이 떨어져 적대적 M&A의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CJ그룹의 경우 이재현 회장의 CJ㈜ 지분 46.84% 상속 과정에서 이 회장의 아들 이선호씨가 상당 규모의 CJ㈜ 주식을 매각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기업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여론을 의식한 탓에 상속세 관련 논의는 눈에 띄는 진전이 없다”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중견기업부터라도 상속세 혜택을 늘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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