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위안부 아니에요" 피해배상서 실종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정부 의료지원 대상 중 근로정신대 여성 3.5% 불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시선에 가족에도 피해사실 숨겨
법조계·시민단체 "피해자 고지 등 국가 차원 노력 시급"
29일 대법원 최종 결론... 원고 손해배상 승소 가능성

일본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진제공=연합뉴스

‘일본 여자근로정신대 피해 소송’ 사건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단이 오는 29일로 다가온 가운데 지금껏 손해배상을 청구한 피해자가 유사 사건에 비해 적었던 이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상당수 법조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여자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시선이 많아 피해 사실을 숨긴 할머니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진단했다.

지난 4월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에 따라 올해 정부로부터 의료지원금(80만원)을 지급받은 징용 피해 생존자는 총 5,245명. 이중 여성 피해자는 187명에 그쳤다. 전체의 3.5%밖에 안 되는 수치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남자 수가 아무리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긴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격차다. 현재 법원 전체에 계류 중인 14건의 강제징용 사건 가운데서도 여자근로정신대 관련은 대법원이 심리 중인 양금덕(90) 할머니 사건 등 소수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전체 강제징용 피해자 중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가 차지하는 실제 비중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적 착취를 당한 종군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사회적 오인으로 피해자 상당수가 근로정신대 경험을 감추고 산 탓에 그 규모가 과소평가됐다는 것이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실시한 전시 동원의 한 종류였다. 일본은 전시체제에 노동력이 부족하자 배우자가 없는 12~40세의 조선 여성까지 군수 공장 등에 투입했다. 동원 목적과 경로가 종군위안부와는 달랐음에도 당시 조선에서는 “정신대에 끌려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방 뒤에도 이 같은 오해는 이어졌다. 혹독한 인권침해 속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고국에 돌아왔지만 피해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혼용됐다. 실제로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의 경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근로정신대에 동원됐다가 곧 종군위안부가 됐다는 설정 때문에 피해자들을 도와주던 일본 시민단체로부터 “사실을 왜곡했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측도 영화 개봉 직후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가 일본군 성노예로 다시 동원된 사례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일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들이 지난달 31일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당수 법조인과 시민단체들은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피해자 수를 정확히 파악해 이들을 구제의 길로 끌어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나 유족에게 그들이 피해자임을 정확히 고지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강제징용 피해자 전체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계는 없는 상태다. 의료지원금은 확인된 생존자에 한해 지급하기 때문에 수급 인원이 곧 전체 징용 피해자 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을 대리한 김세은 변호사는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경우 과거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시선 때문에 자식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사망한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와 유족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노력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대법원은 오는 29일 양금덕 할머니 등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선고기일을 열 예정이다. 법조계에서는 지난달 30일 성격이 비슷한 일본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만큼 이번에도 원고 승소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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