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내다 파는 기업들, 커지는 자산 유동화 시장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실적 악화·신규사업 진출에 부동산 파는 기업들
현대차그룹, GBC 프로젝트 투자자와 공동 개발
한진그룹, 송현동 호텔 부지 내놔
금호아시아나도 그룹 100년 내다보고 지은 사옥 매각
리츠 시장 성장에 기업들 유동화 적극 검토
오피스 사옥명에서 대기업 이름도 사라져



부동산을 내다 파는 기업들이 늘면서 자산 유동화 시장이 커지고 있다. 과거만 하더라도 기업들이 부동산을 소유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최근 현대차(005380)그룹과 같이 핵심 사업에 대한 투자를 위해 본업과 관계가 없는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거나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부동산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산을 매각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주식이나 채권과 같은 전통 자산이 아닌 대체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기업의 자산 유동화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금리로 유동성이 풍부해 기업들이 매각하는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전경 /서울경제DB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실적 악화·신규사업 진출에 부동산 파는 기업들=한진(002320)그룹은 최근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를 연내 매각하고, 제주 서귀포시 파라다이스 호텔 부지도 매각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송현동 부지는 한진이 그룹의 숙원 사업으로 호텔 건립을 추진하던 땅이다. 한진이 알짜 부동산을 내놓은 것은 행동주의 펀드인 KCGI의 압박 때문이다. KCGI는 지난 1월 21일‘국민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진’이라는 자료를 통해 한진그룹의 경영상황을 진단하고 가치를 높이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송현동 부지를 포함한 부동산 매각을 요구했다.

아울러 현대차그룹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들어서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을 위해 해외 연기금과 국부펀드, 글로벌 투자펀드 및 국내외 기관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최근 현대차가 올해부터 2023년까지 5년간 총 45조3,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공개한 가운데 비핵심 자산 유동화를 통해 미래 투자 재원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최근 롯데와 신세계(004170) 등 대형 유통회사들도 자산 유동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롯데와 신세계 등이 보유하고 있는 쇼핑몰이나 백화점 등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투자 재원 확보 차원으로 풀이된다. 롯데와 신세계 등은 최근 이커머스(e-Commerce)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온라인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규모 투자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중 롯데는 이미 리츠 자산관리회사(AMC)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실적 악화 때문에 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자산을 매각하는 대기업들도 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표적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금호아시아나는 지난해 서울 광화문 사옥을 도이치자산운용에 매각했다. 금호아시아나 사옥은 박삼구 회장이 그룹의 100년을 내다보고 지었다고 할 정도로 애착이 큰 건물이었으나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내놓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들어설 현대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준공 후 조감도.
롯데쇼핑이 운영하는 롯데마트 전경 /사진제공=롯데쇼핑

◇풍부한 유동성, 대체투자 관심 높아지며 시장 활기=기업들이 부동산 매각에 적극 나서는 것은 부동산 대체투자 시장의 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최근 기관투자자와 개인투자자를 막론하고 부동산 대체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기업들의 자산 유동화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롯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롯데그룹은 지난 2014년 롯데쇼핑(023530)의 18개 점포를 묶어 싱가포르증권거래소(SGX)에 상장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롯데쇼핑이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를 택한 것은 한국 리츠 시장의 규모가 크지 않고 성숙되지 않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롯데는 최근 한국 시장에서 리츠 공모 상장을 통한 자산 유동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한국 리츠 시장이 성숙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은 지난 2000년대 초반 리츠 제도 도입 당시 기관투자자들의 기업 부동산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기업구조조정(CR) 리츠를 만들어 세제 혜택과 공모 면제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기업들의 자산 매각을 받아줄 수 있는 유동성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는 주로 사모 위주로 부동산간접투자 시장이 성장해 오다 보니 투자자 풀이 기관투자자 한정돼 있어 투자풀 자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크게 바꼈다. 저성장·저금리 국면과 맞물리면서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의 부동산 대체투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정부의 부동산 직접 투자 규제 강화로 인해 개인투자자들의 리츠와 부동산펀드 등 부동산간접투자 상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작년부터 리츠 공모 상장 시장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8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신한알파리츠’의 성공 사례는 기업들이 리츠를 활용한 자산 유동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현재 사모펀드운용사인 MBK파트너스가 소유한 홈플러스가 리츠 상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롯데에 이어 신세계도 리츠 상장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휠라가 처음으로 물류센터를 매각한 것도 최근 물류센터 투자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휠라는 작년에 ‘휠라 물류센터’를 부동산자산운용사인 켄달스퀘어자산운용에 매각한 바 있다. 투자자는 최근 한국 물류센터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캐나다연기금(CPPIB)이다.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있는 점도 기업들이 자산 유동화에 적극 나서는 이유다. 불과 4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 오피스 시장에서 거래된 최고가 빌딩은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페럼타워로 3.3㎡당 2,493만원이었다. 하지만 페럼타워가 가지고 있던 최고가 기록은 매년 경신됐으며, 작년에 매각된 삼성물산(028260) 서초사옥의 경우 사상 처음으로 3.3㎡당 3,000만원 이상에 거래됐다.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 사옥은 지난해 외국계 투자자에게 매각된 후 ‘콘코디언’으로 이름이 바꼈다.

◇오피스 지도에서 사라지는 대기업 사명= 이처럼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들이 매각되면서 서울 오피스 지도에서 대기업 사명이 사라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매각된 금호아시아나 광화문 사옥이 대표적이다. 투자자들은 금호아시아나 광화문 사옥 인수 후 ‘콘코디언(Concordian)’으로 이름을 바꿨다. 또 맞은편의 대우건설 사옥도 조만간 사명을 변경할 예정이다. 대우건설이 이전하면서 김앤장이 입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서울역 맞은편에 위치한 서울스퀘어도 과거 대우그룹이 본사로 사용할 당시 대우센터빌딩으로 불렸으나 모건스탠리에 인수된 후 건물명이 바뀐 사례다.

건물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그간 금호아시아나 사옥은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전체를 다 사용하다 보니 시민들이 쉽게 발걸음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콘코디언을 인수한 외국계 투자자는 제일 위층인 27층을 레스토랑 등으로 꾸며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 대기업이 떠난 빈 자리를 공유 오피스가 채우면서 스타트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서울스퀘어에는 미국계 공유 오피스 업체 위워크(WeWork)가 입주해 있으며, 콘코디언에는 싱가포르계 공유 오피스인 저스트코(JustCo)가 입주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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