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관련 피고인으로 11일 광주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인간띠를 만든 시민들이 11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출석한 전두환씨를 규탄하고 있다.
32년 만에 광주 땅을 밟은 전두환(88) 전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독과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 내심 기대했던 광주시민들은 ‘역시나’하는 마음에 억장이 무너졌다. 23년 만에 다시 재판정에 선 전씨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무죄를 주장하고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전씨의 재판이 11일 오후2시30분 광주지방법원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열렸다. 그동안 출석 여부를 놓고 오랜 기간 줄다리기를 해온 것과 달리 이날 재판은 1시간 46분 만에 끝났고 전씨는 명예훼손을 전면 부인했다. 전씨 측은 법정에서 “과거 국가 기관 기록과 검찰 조사를 토대로 회고록을 쓴 것이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이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다”라며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전씨는 지난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씨는 재판장이 피고인의 진술거부권을 고지하는 과정에서 “재판장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고 헤드셋을 쓰고 다시 한 번 진술거부권을 고지받았다. 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인 인정신문에서도 헤드셋을 쓴 채 생년월일과 주거지 주소, 기준지 주소 등을 확인하는 질문에 모두 “네 맞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얼마 전 알츠하이머를 주장했던 것과 달리 전씨의 정신이 또렷했다는 게 이날 재판을 참관한 사람들의 의견이다. 검찰에 이어 변호인의 모두 진술이 진행되자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씨가 1987년 대통령 재임 시절 이후 광주를 처음 방문한다는 점에서 이날 지역은 술렁였다. 경찰 경호원 10여명과 변호사, 부인인 이순자 여사 등과 함께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한 전씨는 승용차에서 내려 경호원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걸어서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전씨는 법원에 도착해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호원의 제지를 받던 다른 취재진이 손을 뻗어 “발포 명령 부인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이거 왜 이래”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법정에 들어갔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전씨의 이동 경로에 인간 띠 잇기 평화시위를 하려던 5월 단체의 계획은 무산으로 돌아갔다. 이날 고 조 신부를 대신해 전씨를 고소한 조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광주에 많은 일을 저지르고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주범이 광주 법정에 섰다”며 “정말 잘못했다고 한마디라도 해달라”고 촉구했다.
전씨의 차량이 나타나자 미리 법원 쪽문 입구 주변에 모여 있던 일부 시민들은 ‘감옥이나 가라’ ‘구속해라’ 등 고함을 외치며 다소 격양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법원 인근의 초등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자는 약속에 따라 계란을 던지는 등의 물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날 아침 광주로 출발하기 전 서울 연희동 전씨의 자택 앞에는 자유연대·자유대한호국단 등 보수 성향 단체 회원 50여명이 오전7시30분께 집회를 열어 전씨를 응원하기도 했다. /광주=김선덕기자 서종갑기자 sdk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