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은 한국영화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이다. 그가 30억원이 채 안 되는 제작비로 1999년 첩보 영화 ‘쉬리’를 내놓았을 때 충무로에서는 “우리도 이제 할리우드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쏟아졌다. ‘쉬리’는 개봉 후 600만 관객 동원이라는 흥행 신기록을 세운 것은 물론 국내 박스오피스의 규모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키워놓았다.
그러나 ‘쉬리’는 ‘강제규 성공신화’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강제규가 ‘쉬리’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태극기 휘날리며’는 1,174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흥행만큼 놀라운 것은 ‘쉬리’보다 한층 진일보한 기술력과 전쟁 블록버스터의 규모에 짓눌리지 않은 섬세한 감정 연출이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러브콜’이 쏟아졌고 그의 앞날에는 탄탄대로만 놓인 듯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마이웨이(2011년)’는 28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됐음에도 고작 214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는 데 그쳤다. 연출 강제규에 주연은 장동건과 오다기리 죠, 글로벌 합작 프로젝트 등의 화제성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수치였다. 다시 4년이 흘렀다. 블록버스터 연출로 성공신화를 썼던 강제규는 규모는 작지만 착하고 따뜻한 영화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런 마음으로 연출한 ‘장수상회’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갖춘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흥행 면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강제규 감독처럼 한때 충무로를 호령하는 스타 감독이었으나 최근 작품에서 실패의 쓴맛을 본 연출자들이 의욕적으로 차기작 준비에 나서고 있다. 오랜 연출 경력과 제작 노하우를 겸비한 이들 감독이 확실한 재기에 성공하면 늘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충무로의 작품 스펙트럼도 그만큼 넓어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최근작 두 편의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에 관한 한 한국 최고의 전문가인 강제규는 충무로의 대세인 하정우와 손잡고 ‘보스톤 1947’을 준비 중이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동양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쥔 서윤복과 당시 한국 육상 대표팀 감독이었던 손기정의 감동 실화를 담아낸다. 하정우는 손기정 감독을 연기한다. 막바지 프리 프로덕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강제규 감독은 배우 캐스팅과 장소 섭외 등을 마무리하고 올여름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할 계획이다.
‘친구’의 감독으로 유명한 곽경택도 전작에서 흥행 참패의 아픔을 겪은 뒤 차기작 연출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형 SF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 곽경택의 전작 ‘희생부활자(2017년)’는 막강한 스태프와 출연진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30만명을 웃도는 관객 동원에 그쳤다. 현재 곽경택 감독이 촬영 중인 ‘장사리 9.15’는 한국전쟁 당시 772명의 학도병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재현한 작품이다. 김명민·김인권을 비롯해 할리우드 스타인 메간 폭스도 배우로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스타일리스트인 김지운 감독은 프랑스 제작사와 함께 드라마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장화, 홍련’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을 만든 김지운 감독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면서도 언제나 최고 수준의 작품을 선보인 연출자다. 하지만 지난해 개봉한 SF 블록버스터 ‘인랑’은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아쉬운 성적표를 남겼다. 1998년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이래 총 9편의 장편영화를 내놓은 김지운에게 ‘인랑’은 사실상 첫 번째 실패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운은 프랑스 카날 플러스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클라우드47’의 연출을 맡기로 하고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