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경기도 안산시 시화산업공단 한 정밀가공 업체의 기계들이 가동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이희조기자
#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에 위치한 전기부품 제조업체 C사는 지난해까지 총 12명을 고용했다. 하지만 올해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이 중 5명을 내보내야 했다. 이 회사는 대표이사 가족까지 총동원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일손이 마땅치 않아 들어오는 일감마저 마다하는 실정이다. 신구철(50·가명) 대표는 “재료비 등 제조원가가 최저임금 인상 속도보다 두 배 이상 오르면서 전체적인 비용이 증가하는 실정인데, 일시적으로 몰리는 일감 때문에 고정비를 부담하면서 직원을 고용할 수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오랫동안 공단 밥을 먹은 동료 사장들 사이에서 ‘이제는 대한민국 제조업은 끝났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쏟아진다”면서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기업인만 열 명이 넘는다”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28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찾은 남동·반월·시화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한 업체들은 갈수록 깊어지는 불경기의 늪 속에서 버텨내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취재진이 방문한 산업단지는 수도권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단으로, 대다수가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제조 중소기업들이다. 그러나 내수경기 악화와 대외경기 불확실성으로 주력 산업이 흔들리자 중소기업으로 들어오던 일감이 줄어들면서 직격탄을 맞은 형국이다.
더구나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시행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는데다 제조원가와 공장 임대료가 오르면서 고정비는 오히려 늘고 있다. 매출은 정체 상태이거나 감소하고 있는데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이 증가하니 끝내 버티지 못하고 공단을 떠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건비가 싼 베트남 등 해외로 이전하는 곳이 많아지자 공단 부동산 사무소에는 공장 매물만 잔뜩 쌓이고 있다.
28일 오후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에 이름 없는 우편함들이 보인다. 빈자리는 모두 폐업한 회사들 것이다./신한나기자
◇일감 줄면서 생존까지 위협=남동공단에 위치한 한국산업단지공단 인천지역본부 근처에는 화물트럭들이 늘어서 있다. 공단 내 각 공장으로 부품을 운송하는 사업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런데 요즘 이들 운송사업자는 모이기만 하면 “오늘 차 끌고 나가냐”는 안부 인사로 시작한다. 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물량 자체가 줄면서 물류 주문까지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남동공단에서 화물운송 개인사업을 하는 최영달(60·가명)씨는 “지난해에 비해 물량이 3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며 “경기가 나쁘다는 게 실감된다”고 말했다. 택배회사 기사로 근무하는 심상보(47·가명)씨도 “특정 거래처를 매번 같은 시간대에 가는데 ‘오늘은 평상시보다 물량이 적다’고 느끼는 날이 크게 늘었다”며 “우리 같은 봉급생활자야 타격이 덜 하지만 개인사업을 하는 물류기사들은 타격이 엄청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남동공단에서 생산하는 물량은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최저임금 인상에다 불경기까지 겹치자 고정인력을 대폭 줄인 데 따른 것이다. 더구나 근로시간 단축에 선제 대응하는 과정에서 품질관리 인력마저 대폭 줄면서 생산성과 품질 유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금형 제조업체 D사의 윤철민(42·가명) 이사는 “우리는 아직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받는 곳은 아니지만 2조 2교대를 3조 2교대로 바꾸며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라인별로 필수인원을 채워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보니 혹여라도 품질 관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8일 인천 남동구 남동국가산업단지에는 250평짜리 공장을 임대한다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신한나기자
여기에다 원청이 물량을 대거 줄이면서 일감 자체가 감소해 생존까지 위협받는 실정이다. 주력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1·2차 벤더(협력사)의 생산량도 감소하고 이들의 물량을 받는 영세기업도 물량이 줄어드는 ‘연쇄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원청이 부추기는 ‘협력사 단가경쟁’도 여전하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6차 벤더인 금속 제조업체 E사에 근무하는 양성진(45·가명)씨는 “협력사가 힘든 것은 대기업의 개발과 투자가 줄었기 때문”이라며 “개발을 해도 문제인 게 대기업들이 1차 벤더에 개발경쟁을 시켜 가격을 낮춘다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했다. 이어 “대기업들은 실사 목적으로 1차 벤더 공장에 와서 설비나 사용기기를 다 조사한 후 이를 인건비가 싼 동남아 지역 공장에 맡겨버린다”며 “지난해에는 한 대기업이 1차 벤더들에 ‘올해 하반기까지 더 이상의 개발이 없을 것’이라고 통보하자 군포·부천·화성에 위치한 각종 계열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은 일까지 있었다. 대기업의 결정이 중소 제조업체와 여기서 일감을 받는 물류사업자의 목숨줄을 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동공단 인력사무소 일감도 줄어들고 있다. 남동공단의 한 인력사무소 관계자는 “예년에 비해 올해 기업에서 인력을 구하는 수요가 4분의1 수준으로 축소됐다”며 “한 달에 한두 건이 겨우 들어오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는 “망하거나 경기가 좋지 않아 남동공단을 떠난 기업이 많아지면서 우리 거래처도 크게 줄었는데,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최저임금 때문에 망했다고 말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F 금속업체의 이길영(52·가명) 대표는 “남동공단에서는 회사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소리 없이 죽고 있는 것”이라며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를 보니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데, 기업인이 공장 문을 닫는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물었다.
◇“일이 없으니 회사 사장이 ‘일당벌이’까지”=시화공단에서 산업용 기계 제조업을 하는 G사의 임현호(52·가명) 대표는 “지난해에 일감이 전년 대비 60~70%나 줄었다”며 “아는 사장 중 한 명은 워낙 일이 없어서 일당벌이를 하고 다니기도 한다”고 했다. 시화공단에서 생산자동화기기를 만드는 H사의 노영만(58·가명) 대표는 “시화공단이 원래 토·일요일 없이 돌아가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저녁에도 불 켜진 곳을 보기 힘들다”고 씁쓸해했다.
공장 매물은 나오고 있는데 분양률은 줄어들고 있다. 특히 휴대폰 정밀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다수 들어서 있는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하는 곳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 시화공단에서 부동산을 하는 경태윤(47·가명) 대표는 “요즘 아파트형 공장의 분양률이 절반 수준이며 최근 분양하는 곳은 20~30%에 못 미치기도 한다”며 “휴대폰 부품업체들이 인건비가 싼 베트남으로 이전하면서 공실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연차에 따른 임금격차가 줄자 내부 불만이 늘었다는 회사도 있었다. 반월공단에서 산업용 로봇을 생산하는 I사의 한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5년차 직원과 신입직원의 임금 차이가 없어졌다”며 “젊은 직원들도 많이 없어 직원 20명 중 40대가 가장 많고 20~30대는 합쳐서 4~5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남동·시화·반월공단의 가동률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전국 산업단지공단 가동률은 2015년 80.9%에서 2018년 79.4%로 소폭 하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남동·반월·시화공단 가동률은 올 1월 기준 각각 67%, 73%, 68.4%로 침체돼 있다. 홍순영 한성대 특임교수는 “보통 공단 가동률이 80%대인 게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산단 가동률은 부진한 상황”이라며 “기업 활동의 핵심이 수입 극대화와 비용 최소화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노동임금을 올리는 정책보다는 탄력근로제와 중소기업 판로 개척 등 기업 생산을 도울 수 있는 정책적 접근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심우일기자 인천=허진·한민구·백주원·방진혁·신한나기자 안산=전희윤·권혁준기자 시흥=이희조·김인엽기자 vit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