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산둥(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1906년 부친의 별세로 귀국했다.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이후 평남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해 교육계몽 운동을 전개했고,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 독립전쟁 전략을 구사하고자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1908년 연추(煙秋)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해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결심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에게 총탄을 명중시켰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됐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은 일본인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됐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이 선고됐다.
안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뤼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저술을 끝냈다. 이어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했고,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