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영재발굴단’에서 수십 대의 선풍기를 야무지게 해부하고 그 원리를 줄줄 읊는 과학영재로 출연해 화제가 됐던 황윤하 군의 엄마 이연진 씨는 집을 제일 좋아하는 집순이에 무리지어 다니기보단 홀로 책 읽는 게 낙인 책순이, 조용히 내 안에 접속해 에너지를 얻는 내향적인 성향이다.
이연진 씨는 뜻하지 않게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불안에 떨고 있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경험을 해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집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아이의 내면과 정서는 더욱 편안하고 단단해진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집에서 자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주변의 엄마들처럼 공동육아도 해보고, 이런 저런 활동적인 활동도 해봤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힘이 빠지곤 했고 주눅이 들곤 했다. 육아의 기준 자체가 활달한 활동과 강력한 보상을 즐기는 외향인들에 맞게 설정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이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고 일찌감치 가정식 책육아를 실천하며 아이를 교육해왔다.
아이와 함께 집과 동네를 거닐며 책을 읽고 일상 속에서 소소한 기쁨과 배움을 채워나가며 느리지만 세심한 육아를 시작했고 그 경험담을 오롯이 담아낸 책 <내향 육아>가 발간됐다.
다음은 <내향 육아> 이연진 저자와의 일문일답.
Q.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엄마로서 아이를 육아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었는가?
주변의 엄마들처럼, 혹은 육아서나 블로그의 엄마들처럼 ‘열심히’만 하면 좋은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자극을 줘야한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엄마가 활력이 넘치고 대범해야 한다는 소리도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어쩔 도리도 없이 주눅이 들곤 했다. 나는 행동파나 수다쟁이는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한 순간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엄마가 되려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안으로’ 바쁜 사람들이다. 생각이 많고 감각과 감성도 예민한 편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여러 생각과 감정이 일고, 아이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니 배로 힘들었다. 게다가 아이와 24시간 붙어 있느라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해 방전 상태였다. 그런데 힘든 이유를 모르니 늘 ‘왜 내 육아만 이렇게 힘들까?’하며 자책하는 심정이었다.
Q. 본인이 다른 에너지 넘치는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의 육아를 하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불안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나는 하나에 오래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유행의 속도가 버거웠다. 강남의 대단지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너무 많은 말이 들렸다. 종잡을 수가 없더라. 그러는 사이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이와 다정히 지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서울 근교의 조용한 마을로 이사했다. 고정된 소수의 이웃이 있는 이곳으로 오니 모든 게 훨씬 편해졌다. 수는 적지만 ‘주민’이 아니라 진짜 ‘이웃’이라 느껴졌다. 또 남들 말에서 멀어지니 확실히 홀가분해졌다.
나와 감수성과 성향이 잘 맞지 않는 육아서와 블로그도 그때 정리가 되었다. 타인의 속도가 아닌 우리의 속도로 걸어보니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예를 들면 아이의 행동이 아닌 마음이, 행위의 결과가 아닌 과정이 말이다.
틈틈이 내 자신을 돌아보며 취향과 결을 살피는 일도 한결 수월해졌다. 육아하며 어느 때보다 더 깊이 나라는 사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처음엔 아프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시나브로 그 점이 좋아졌다. 아이와 나, 가족과 일상을 돌보는 소박한 일과에서 작은 기쁨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 동그란 매일이 쌓일수록 마음은 편안하고 단단해질 수 있었다.
Q. 최근 코로나19 이슈로 인해 집에서 하는 육아에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집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놀이나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예전엔 인터넷이나 책에서 본 놀이들을 해주려고 다짜고짜 애를 썼다. 그런데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다른 아이와 엄마의 기준에서 제시한 놀이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나 또한 의무감으로 임했던 것도 있고 나름 힘들게 놀이를 준비했으니 어떤 결과를 기대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놀이가 내 마음대로 안 되면 화가 났고 아이도 짜증을 내곤 했다.
결국 어느 정도 내려놓고 아이를 너그럽고 가뿐한 마음으로 대했더니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아이 스스로 놀이를 찾게 되더라. 예를 들면 우리 아이의 경우 선풍기 수리공 놀이를 하곤 했는데 그런 놀이를 할 때면 아이도 나도 훨씬 즐겁고 편했다. 특별한 준비물이나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준이나 비교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 마음이 편할 때 아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 궁금한 것을 찾아갈 수 있다.
Q. <내향 육아> 책을 보면 학원식 책 육아가 아닌 가정식 책 육아를 실천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순진하게도 나는 아이에게 책 한두 권 읽어주는 게 ‘책 육아’의 전부인 줄 알았다. 검색 창에 ‘책 육아’라고 검색하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느낌이었다. 대중적인 책 육아가 엄마의 열성과 정보력, 리더십으로 완성된다는 게 충격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책육아 인플루언서 몇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대단한 활동가들이셨다. 아이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건 물론이고 여러 사모임을 꾸리시는 분들이셨다. 게다가 강연에 방송일까지. 한참 기가 죽어 있다가 알게 되었다. 그분들과 내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외향인은 흥분을 일으키는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으로부터 행복감을 얻지만, 내향인은 차분하고 잔잔한 감정을 일으키는 아세틸콜린으로부터 행복감을 얻는다고 한다. 내향인은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분비되는 도파민 양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기 때문에 많은 외부 자극이 필요 없다. 오히려 필요 이상의 도파민이 불러오는 불안과 동요는 에너지를 빠르게 연소시킬 뿐이다.
특히 내향적인 사람들은 주변 환경에 민감하다. 기질적으로 외부자극에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편안한 분위기와 익숙한 환경 안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에 녹아든 슴슴한 ‘가정식 책 육아’가 우리에게 가장 잘 맞았다. 냉장고 속 재료로 숭덩숭덩 만들어낸 집밥 같다고 할까, 수수한 봄나물 같다고 할까? 당장은 심심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물리지 않고 속이 편안해진다.
Q. 그렇다면 아이에게 어떤 책을 얼마만큼 읽도록 하는 게 좋을까?
사실 책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류나 양보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유년기엔 ‘읽는 일’이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면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카탈로그, 영수증, 요리책은 물론 학습 만화도 일부 허용했다.
비싼 전집을 들이면 기대가 생기고, 과한 기대는 아이와 엄마에게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싼 유명 전집은 사지 않았다. 몇 권을 읽었는지 세지도 않고 억지스런 독후 활동도 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낡은 책 한 권을 읽어줘도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는 게 좋다. 훗날 아이가 읽은 책의 제목보다 ‘엄마와 책 읽는 다정한 순간’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Q.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 활동적인 아이는 먼저 책과 친해지게 만드는 과정도 중요할 것 같다. 아들 윤하 군도 에너지 넘치는 아이라던데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내향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무의식의 힘을 특히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분위기는 무의식에 저장된다. 서점들이 편안한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고, 시그니처 향을 만들어 판매까지 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집에서도 책과 좋은 기분을 연결하기 위한 사소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가 책을 읽을 때면 조용히 일어나 주위를 살핀다. 눈부시지 않도록 커튼을 쳐 주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 준다. 주로 아이를 안고 책을 읽어줬기에 촉감이 좋은 옷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쾌적하고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활동적이고 까다로운 아이에게는 강압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좀 더 은유적이고 순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솝우화 ‘바람과 태양’에 나오는 태양처럼 부드럽게 아이의 자발적인 선택을 끌어내고 싶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로 자란 건 그 덕분이지 싶다.
Q. 육아에는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의 역할도 아주 큰 것 같다. 윤하 군의 아빠는 어떻게 교육하는가?
남편은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다. 아이의 질문에 쉽게 답을 해주지 않는다. 대신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확장이 된다.
나 역시 그 말이 맞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어렵던 과학 법칙들이 아이와 실험하고 이야기 나누며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이해가 됐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Q. 요즘처럼 밖에 나가지 못하는 시기에는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발로 뛰며 아이의 교육을 시켜왔던 외향적인 엄마들의 입장에서 반대로 아주 불안할 것 같다.
아이들의 관찰력과 감수성은 어른의 상상 이상으로 예민하다. 그들에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과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경험을 해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집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아이의 내면과 정서는 더욱 편안하고 단단해진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집에서 자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다.
Q. 내향적인 엄마라서 자책하고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내향인 독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세상엔 나처럼 조용하고 미온적인, 적당히 기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외부보다는 내면에, 보상보다는 자기만족에 의해 움직이는 그분들이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 덕에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행복하게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이렇게 글쓰기의 취미도 꺼내보게 되었다. 자극과 돌발을 최소화한 미니멀 라이프와 책육아를 진행한 것도 자극에 민감한 내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내향인들에게는 섬세함, 집중력, 관찰력, 공감력 등 육아에 필요한 장점이 정말 많다.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이가 있다는 것은 멀지만 분명한 위안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고맙다. 당신은 충분히 애쓰고 있다고, 무엇 하나 마음만큼 안 되어도, 남들보다 느리고 자주 눈물을 흘려도, 꾸준히 나아가는 엄마는 장하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김동호 기자 dongh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