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일 모델로피부과 원장
필러는 볼륨 효과를 이용해 골 진 주름을 펴고 꺼진 부분을 채워주는 주사제를 총칭하는 말이다. 제대로 된 필러 주사제는 지난 198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소 콜라겐 성분의 ‘자이덤®’ 콜라겐 필러가 원조다. 그러나 콜라겐 필러는 다른 동물의 단백질로 알레르기 반응이 많아 요즘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 2000년대 들어서는 피부의 탄력 성분 중 하나인 히알루론산 필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세균이 만드는 히알루론산을 정제한 히알루론산 필러는 인체 성분과 똑같고 다당류이기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 거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히알루론산 필러만이 녹일 수 있는 해독제가 있다는 것이다. 해독제를 주사하면 수 분 안에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돼 사라진다. 따라서 시술 후 울퉁불퉁하거나 자신의 인상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간단하게 주사로 녹여 원상회복이 가능하다.
이런 장점 때문에 히알루론산 필러가 다른 필러 성분을 제치고 필러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았고 이제 수술 시장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다. 낮은 콧대나 무턱, 납작한 이마에 실리콘 보형물을 삽입하는 수술 대신 주사로 간단하게 교정하는 코 필러, 턱 필러, 이마 필러 같은 ‘쁘띠 성형’은 수술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없어 큰 인기다. 무엇보다 필러 시술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볼륨 효과를 이용해 피부 나이를 되돌릴 수 있고 원상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술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필자는 엉뚱하게도 히알루론산 필러처럼 ‘우리 인생도 시간을 되돌려 잘못된 걸 수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과거에 내가 실수했던 것을 만회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면 좋을 것 같다는 원초적 바람에서다.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서 과거를 바로잡는 영화는 그동안 많이 소개돼왔다. 1980년대 흥행에 성공한 ‘백 투 더 퓨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편은 마티 맥플라이(마이클 J 폭스 분)가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 분)의 타임머신 차를 타고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 고등학생인 자신의 엄마 아빠를 만나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소심한 아버지를 변화시키는 얘기다. 2편은 30년 후 미래로 가서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3편은 100년 전 과거로 가서 브라운 박사의 선조를 구하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과거가 수정되면 현재가 바뀌는 인과관계율이 세 편에 걸쳐 흥미롭게 펼쳐지는 영화다.
이 영화처럼 내 인생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 핀셋 수정할 수 있다면 모를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만약 메피스토가 20대로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글쎄올시다, 의대 6년, 전공의 5년, 군의관 3년, 펠로 3년, 개원의 20년, 이렇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50대가 됐다. 마음은 아직 20대지만 무릎·어깨·목 관절도 안 좋고 머리는 새치 수준을 넘어 반백에 가깝다. 이제는 어느 모임에서건 시니어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세월을 직접 체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피스토가 20대로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유혹해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의대 공부를 하면서 받았던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다시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의대 기말고사인데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한 악몽은 40대까지 계속됐다. 전공의, 군의관, 펠로,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도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던 미래를 걱정하는 일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해외에서 강의할 때마다 유창하지 못한 영어를 커버하기 위해 영어 스크립트를 밤새 달달 외우고 싶지도 않고 보톡스·필러 교과서를 쓰기 위해 새벽까지 집필의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병원 3개를 방만하게 운영하다 2008년 리먼 사태 여파로 인한 재정난을 엔화 대출과 카드로 겨우 돌려막기 했던 건 생각만 해도 두렵다. 다만 젊은 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것은 유일하게 돌이키고 싶은 부분이다. 일 년이 또 저물고 있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2020년을 나를 좋아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직원들, 고객들과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그런데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누가 돌이켜줄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