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국무총리가 2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신 늑장 대응’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직접 방송에 출연해 경위를 설명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새다. 오히려 정 총리가 “확진자가 100명대인 지난 7월에는 백신 의존도를 높일 생각을 안 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 데서 우리 정부의 K방역에 대한 지나친 ‘자만’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온다.
8일 정부가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2.5단계로 올렸지만 신규 확진자 수가 연일 최다 기록을 경신하면서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신속하게 대응하던 우리 정부가 어느 순간 백신 확보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 조정, 병상 인프라 확충까지 줄줄이 늦장 대응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거리 두기 강화를 선뜻 시행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사이 신규 확진자 수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고 있어 또다시 ‘실기’를 반복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정 총리는 20일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해 정부가 선구매 계약을 마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이르면 내년 2월, 늦어도 3월에는 접종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나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고 접종이 진행 중이거나 곧 시작될 예정인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은 “내년 1·4분기 접종이 어렵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백신 확보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백신의 효과성과 안전성이 확보돼야 하는데 시간이 매우 짧아 안전의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총리는 제약사들이 백신 부작용의 책임을 구매자가 지도록 했고, 백신 개발이 실패하더라도 선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계약을 구매자에게 요구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런 계약서를 본 적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우리 대한민국이 다국적 기업보다는 뒤지지만 스스로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나라”라며 “우리 기업의 역량도 지원하고 관심도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7월 방역에 실패한 미국·영국이 ‘백신 개발비’까지 대며 백신에 의존한 반면 우리는 확진자가 100명대에 그쳐 백신 개발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는 게 정 총리의 설명이다. 국내 업체 중 SK바이오사이언스·제넥신 등이 국산 백신 개발에 나섰지만 실제 상용화는 내년 말 또는 내후년 초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의 이 같은 설명은 오히려 정부가 단기적 대응에 집중했을 뿐 코로나19 중장기 전략이 없었다는 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선진국들이 백신 접종을 본격화할 시기에 ‘백신 공백’이 오는 것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 역시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내년 말까지 진행될 수 있는 상황에서 결국 백신을 확보해 전 국민 집단면역을 빠르게 달성하는 게 관건이었다”며 “백신 확보라는 중장기 전략 없이 정부가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내년 2월까지 백신 접종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 상향’을 통해서라도 확산세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역시 주저하고 있다. 정 총리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활동이 멈춰야 하기 때문에 고통이나 피해가 심각하다”며 “3단계에 가지 않고 유행이 멈추면 최선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거리 두기 격상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반복했던 “경제와 방역을 모두 잡겠다”는 의지를 또다시 밝힌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확산세를 잡지 못하면 결국 더 큰 경제적 충격이 온다는 점에서 하루라도 빨리 거리 두기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감염 집단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면 하루 확진자가 금방 2,000명대로 오를 수도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거리 두기를 3단계로 올려 사람 간 모임·만남 등 접촉 자체를 조금 더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한번에 3단계 방침을 마련해 시행하기 어렵다면 중간중간 가이드라인이 확정되는 대로 곧바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방역 대책 강화 타이밍을 계속 놓치면서 이제는 수도권만 문제가 아니라 전국이 힘든 상황이 됐다”며 “일부 지역만이라도 일단 거리 두기를 강화하고 문제가 생기는 점들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할 ‘의료 인프라 구축’ 역시 정부의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정 총리는 이날 “병실은 많은데 문제는 의료진과 장비”라며 “숙련된 간호 인력과 전문적 감염병 전문의가 필요하다”고 털어놓았다. 정 총리는 또 그간 정부가 ‘국시 거부 의대생 구제’를 반대해왔음에도 “코로나19 상황까지 감안해 조만간 정부의 결정이 있을 것”이라면서 입장을 선회할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다. 의료 인력에 대한 절박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야당은 대통령에게 직접 백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영국·미국·캐나다·유럽 등 30여 개 나라에서 백신 접종을 시작하는데 우리 국민들은 언제 안전한 백신을 맞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며 “3단계 격상, 백신 문제도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서서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책을 보고하라”고 밝혔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국민 여론이 (거리 두기) 3단계를 요구할 정도로 끓어오를 때까지 군불만 때는 것이냐”며 “지금의 재앙적 상황의 책임은 모두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김인엽·이주원기자 insid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