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5일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타워에서 열린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첫 회의에서 김지형(왼쪽 두 번째) 위원장이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이 변하고 있다. 과거의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바탕으로 뿌리부터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선대부터 이어진 경영권 승계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고 시대정신을 반영해 철칙같이 고수했던 무노조 경영도 포기했다. 협력 업체와는 공동 기술 개발에 나서는 등 ‘동행’을 실천하고 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삼성으로 거듭나겠다는 몸부림이다.
변화와 혁신의 중심에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위)가 있고, 삼성그룹과 계열사의 실천 의지가 있다. 지난 2019년 10월 25일 처음 열린 파기환송심(서울고법 형사1부)에서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준법위 필요성을 언급했다. 삼성은 2020년 1월 준법위를 구성하고 변화의 물꼬를 텄다.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조정위원장을 지낸 김지형 전 대법관이 준법위원장을 맡았다. 이 조직은 삼성 7개 계열사(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삼성생명·삼성화재)가 가입된 외부 기구로 출범했다.
삼성의 준법·윤리 경영을 감시하고 있는 준법위의 지난 1년간 활동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삼성 측도 준법위의 독립적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면서 쇄신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삼성이 준법위를 구성한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라며 “위계 구조를 갖고 있는 조직에서 정식으로 최고경영자에 대한 견제 수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재판부의 권고에 따라 출범한 준법위가 삼성에 요구한 사항은 크게 네 가지다. △경영권 승계 논란에 대한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 △노동법규 위반 등에 대한 사과 및 무노조 경영 포기 선언 △시민사회 신뢰 회복을 위반 방안 마련 △준법위 존속에 대한 우려 불식 등이다.
경영권 승계 논란에 대한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에 대해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나섰다. 지난해 5월 기자회견을 열어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그동안 저와 삼성은 승계 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책을 받아왔다”며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특히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선언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준법위에서 권고한 노동 관련 이행 사항도 실행에 옮기고 있다.
경영권 승계 포기는 한국 사회에 고착화된 후계 승계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다.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탈법과 위법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오너들은 회사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CEO)에게 책임 경영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영권 승계 문제를 사과하고 자녀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삼성이 투명하게 나아가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그동안 삼성의 지배 구조에 대한 투명성 논란이 불거졌는데 이 같은 선언은 삼성이 체질 개선을 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무노조 경영 폐기는 삼성으로서 매우 큰 변화”라며 “무노조 경영을 실천할 리더십이 그동안 없었는데 준법위를 계기로 발판이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지난해 2월 임직원들의 일부 시민 단체 후원 내역을 무단 열람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시민사회와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소통 창구 역할을 수행할 전담자를 지정하기로 했다.
삼성 측도 준법위 활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준법위가 본연의 역할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충분한 뒷받침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준법위 권고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삼성의 노력에 전문심리위원단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전문심리위원단(3명)은 재판부가 지정한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 특검 측 홍순탁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회계사, 삼성 측 김경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로 구성됐다. 재판부 직권으로 지정된 강 위원은 지난해 12월 보고서를 통해 “준법위가 회사 내부 준법 감시 조직과 유기적으로 연계 활동해 한계를 보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준법 감시 제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준법위 조직과 구성, 최고경영진의 지원, 회사 내 준법 문화, 여론의 관심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준법위 지속 가능성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다만 홍 회계사와 김 변호사는 각각 부정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으며 엇갈렸다.
준법위 전문심리위원단의 평가가 이 부회장의 양형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공정과 객관성을 절대 잣대로 삼는 법원에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 수는 있다. 준법위 활동을 측면 지원하고 준법위의 권고 사항이나 가이드라인을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삼성 측의 행보에 대해서는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전희윤·이수민기자 heeyou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