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한공주’, ‘곡성’ 이름만 들어도 강한 캐릭터가 떠오르는 천우희가 ‘멜로가 체질’의 현실적인 인물에 이어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수채화같이 맑고 수수한 얼굴로 변신했다. 헌책방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20대 여자.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영화에서 보여준 우여곡절 많은 캐릭터와 비교하면 특별하게 느껴진다. 천우희는 그런 새로운 모습이 묻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크게 만족해 했다.
28일 개봉을 앞둔 ‘비와 당신의 이야기’(이하 ‘비당신’)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지루한 삼수 생활을 이어가던 영호(강하늘)가 어느 날 문득 초등학생 시절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친구 소연을 떠올리고 무작정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소희(천우희)는 아픈 언니 소연을 대신해 영호에게 답장을 보내게 되고, 두 사람은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이 ‘비 오는 12월 31일에 만나자’는 가능성 낮은 약속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영화 속 천우희는 맑고 청량하다. 가수 비의 ‘나쁜 남자’, ‘태양을 피하는 방법’ 등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던 조진모 감독이 “천우희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공을 들인 결과다. 천우희 또한 시나리오에 나온 소희의 ‘예쁨’을 표현하기 위해 조 감독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면서 연기했다. 화면에 어떻게 나올지 고민하기보다 감정이나 상황에 집중할 때, 조 감독이 그의 움직임이나 각도를 세세하게 조율해 줬다.
“작품 속 제 모습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어요. 시나리오와 90% 이상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았거든요. 제가 했던 캐릭터 모두 매력적이고 예뻤다고 생각이 들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예쁨’이잖아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예쁨’을 표현한 것인데, 그런 것들이 잘 나온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약간의 맑은 모습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이 간간이 보인 것 같은데 관객 반응이 궁금해요. 저는 만족스러운데 안 그럴 수도 있잖아요.”(웃음)
보는 이들에게 소희로 동화된 천우희의 모습은 새롭게 느껴지지만 의도적 이미지 변신은 아니다. 그동안 선보였던 본드 소녀(‘써니’), 성폭행 피해 학생(‘한공주’) 등 캐릭터들이 간극이 크다 보니 이미지 시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마다 끌리는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뿐이다. 그는 작품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들이 작품 활동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여기고 있다.
“전작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연기하지 않아요. 다르게 하고 싶어도 나고, 같게 하고 싶어도 나거든요.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캐릭터가 영화의 분위기와 같이 흘러가는 게 좋은데 ‘비당신’은 편안하게 연기해도 신선하게 다가갈 것 같았어요. ‘전작들과 대비가 될 테니 힘을 빼야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비당신’의 또 다른 포인트 중 하나는 공백이 많다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나열된 느낌이 아니라 담백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배우들이 직접 연기로 공백을 채울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천우희는 시나리오 속 소희를 입체적으로 만들면서 최대한 에너지를 절제하고 단순하게 연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편지로 소통하는 영호와 소희의 교감 역시 담백한 내레이션으로 표현했다. 대면 연기가 아닌 내레이션으로 감정선을 이어가야 했지만 어려움보다 상상력에 맡겨 연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표현 방식도 훨씬 더 열려 있었다.
“초반에는 연기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강하늘 씨의 내레이션을 들었어요.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져서 좋더라고요. 그 느낌을 복기하면서 연기할 때 적용했어요. 소희는 처음에 본인을 드러내지 않고 소연으로서 편지를 쓰려고 했다면, 어느 순간부터 본인의 이야기를 해요. 본인의 감정을 공유하려고 하는 거죠. 그런 약간의 미묘한 차이를 담고 싶었어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솔직함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특별 출연으로 큰 존재감을 과시한 수진 역의 강소라와는 극 중에서 접점이 없다. 하지만 신인 시절 ‘써니’에 함께 출연했던 강소라와 10년 만에 같은 작품으로 만난 것만으로도 기쁘다. 어렸을 때 동고동락하던 동료와 재회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 긴 세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서로의 자리를 잘 지켜오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언론시사회 때 (강)소라 씨의 연기를 처음 보고 바로 연락을 했어요. 그동안 소라 씨의 필모그래피가가 좋았지만 이번 연기가 그동안의 연기 중에 가장 좋았거든요.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소라 씨만의 매력과 연기력이 잘 보였다고 생각했어요. 편안함도 느껴졌고요. 동료로서 그런 모습이 대견하고 응원해 주고 싶었어요.”(웃음)
‘비당신’은 멜로 영화지만 사랑보다는 청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천우희 또한 ‘비당신’이 젊은 남녀의 이야기가 사랑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느낌을 담은 것이라 차별성이 있다고 느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두 청춘의 연대감, 교감과 공감이 더 크게 느껴져 이 작품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20대도 돌아보게 됐다.
“저의 20대는 서투르고, 어색하고, 조금은 투박했을지라도 굉장히 찬란하고 반짝이는, 뜨거웠던 시절이었어요. 인생 경험도 많지 않고,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것이 아니어서 여러 가지 실패와 난관을 겪으면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시기였죠. 30대를 바라보는 이들이 모두 그럴 텐데 너무 겁내지 말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20대 초반의 천우희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라고 하고 싶어요.”
“‘비당신’은 관객들에게도 저에게도 편하게 한 번씩 꺼내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연기를 보는 분들은 항상 ‘어렵고 마음이 힘든 작품이 많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 작품은 저도 한 번씩 곱씹으면서 잔잔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승현 기자 chus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