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전 세계에서 전면적인 장비 확보전에 나서는 것은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 장기전에 대비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말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SMIC 제재 이후 미국 정부의 반도체 규제가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생산능력과 상관없이 장비를 사서 쌓는 식의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도 최근 중국의 움직임을 두고 “이례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삼성전자·SK하이닉스 역시 장비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팹 증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며 장비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례 없는 장비 부족 현상으로 장비 납품 기간이 1년 이상 소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대규모 장비 구매 움직임을 지속한다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의 장비 확보전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최근 중국의 행보를 미중 간 2차 반도체 전쟁의 서막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5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오는 2025년까지 정보기술(IT) 기기 조립에 쓰이는 반도체의 70%를 자국에서 생산하겠다는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이후 푸젠진화(JHICC), 양쯔메모리(YMTC), 창신메모리(CXMT) 등 메모리 업체 외에도 파운드리 업체 SMIC, 화웨이의 칩 설계 자회사 하이실리콘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며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내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지난해 미국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를 압박하기 위해 기술 우위를 지닌 반도체 장비 관련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램리서치 등 내로라하는 자국 장비 업체의 장비는 물론 네덜란드 ASML이 독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판매 절차까지 까다롭게 만들면서 10나노(㎚) 이하 반도체 공정을 개발하고자 하는 SMIC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최근 미국에서는 EUV 장비 외에 범용으로 쓰이는 심자외선(DUV) 노광기까지 중국 수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규제 강도가 높아질 조짐이 보인다.
이에 따라 중국 업체들은 향후 미국의 규제 압박에 따른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장비 입도선매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중국 업체들의 움직임은 수치로도 나타나는데 미국·일본 등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의 중국 매출 비중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올 1분기 반도체 식각 분야 강자 램리서치의 중국 매출은 전체의 32%를 차지했다. 일본 장비 회사 도쿄일렉트론(TEL)의 올 1분기 반도체 장비 부문 매출의 약 25%가 중국에서 나왔다. 4분기 연속으로 중국이 한국·대만을 제치고 매출 1위를 기록한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이 매출은 삼성전자 시안 공장, SK하이닉스 우시 공장, TSMC 팹 등 비(非)중국 유력 반도체 업체들의 공장을 상대로 한 실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 현지 업체들은 가동 가능한 생산능력에 상관없이 우선 장비 재고를 쌓는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국내 장비 업체를 물색해 미국 장비에 대한 의존도를 최대한 낮추려는 모습도 포착된다. SMIC는 조만간 국내 업체가 만든 장비를 신규 12인치 웨이퍼 양산 라인에 투입하기 위한 테스트를 진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장비 재고를 늘리고 대체 장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미국과의 반도체 패권 다툼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EUV 장비를 현지에 들일 수 없는 실정을 고려해 지속적으로 운영 중이던 10나노 이상 반도체 생산에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미국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한 8인치 공정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도 크다. 중국 업체들은 일본에서 중고 장비 역시 ‘싹쓸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K증권은 앞서 “중국 업체의 8인치 중고 장비 대규모 구매로 미국의 8인치 파운드리 생산능력 부족이 이어질 것”이라며 “중국의 8인치 생산능력이 집중적으로 증가한다면 미국은 중국과 일부 협력이 필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장비 쟁탈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30개 가까운 팹이 내년까지 새롭게 증설되지만 각 반도체 장비사들의 장비 생산능력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새로운 장비를 받으려면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만큼 주문량이 밀려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국내 업체들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파운드리와 메모리 생산능력을 대폭 늘리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비상 대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들은 지난주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미국 동부와 서부 지역에 위치한 주요 부품·장비 업체와 직접 만나 장비 수급 부족 현상 및 중국 투자와 관련한 위험 요인을 줄이기 위해 협조 요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다만 중국의 움직임에 따른 자사 반도체 장비 수급 상황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한 반도체 장비 업체 대표는 “향후 중국의 설비투자 여력과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해령 기자 h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