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일본을 상대로 역전한 장면은 그야말로 스포츠 만화의 고전적 스토리다. 그 장면이 만화가 아닌 실제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레슬링이 선전했다. 그때 해설자가 흥분하면서 한 이야기가 “빠떼루를 줘야 합니다”였다.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잘못 하면 다들 “빠떼루를 줘야 해”라는 말을 했을 정도다.
빠떼루는 ‘파테르’라는 레슬링 용어의 일본식 발음으로 수동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 주는 벌칙이다. 매트의 중앙에 엎드린 자세로 있게 하고 무방비 상태인 뒤를 상대방이 공격한다. 벌칙을 받는 사람은 납작 엎드려서 뒤집히지 않으려 버둥거린다. 무조건 버텨야 하며 별다른 전략이 없다. 실패하면 벌렁 뒤집혀버린다.
살면서 우리는 때때로 파테르를 받는다. 이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이유도 모르고 받는 파테르도 많다. 마치 독수리 발톱에 잡힌 토끼처럼 인간은 파테르 자세를 취하고 운명의 공격을 견뎌야 한다. 파테르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업’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의 섭리’라고 한다.
코로나19라는 파테르가 덮쳤다. 세상의 구조가 뒤집히면서 극적으로 사업이 잘된 사람이 있지만 그 반대로 삶의 코너까지 몰리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면서 파테르를 받고 있는 것이다. 파테르를 받으면 안타깝게도 거칠고 집요한 공격에 뒤집혀버리기도 한다. 버티는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길눈이 어두운 내가 가진 경험칙(經驗則)이 하나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의심이 들 때는 조금 더 걸어가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는 마음이 초조하다 보니 목표물이 보이지 않으면 의심한다. 그래서 목표물을 바로 앞에 두고는 길을 지나쳤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다른 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우직하게 좀 더 걸어가 보는 게 정답이다.
서울의 삼청동 거리를 산책하다 불은 켜져 있고 안에는 주인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 분식집을 보노라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코로나19로 1년 이상 이런 일이 끝날 듯하면서 반복되고 있다. 백신을 모두 접종하면 삶이 정상화되는가 했더니 또 변이 바이러스가 덮쳤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우울증도 급증하고 있다. 지금이 가장 어려운 때인 것 같다.
포로수용소에서 곧 나갈 거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은 반대의 현실에 바로 좌절하는 반면 녹록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끝까지 생존했다고 한다. 코로나19라는 파테르가 생각보다 오래 우리를 덮치고 있다. 이런 때 운명이니 팔자니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이유를 찾다 보면 마음만 민감해져 우울해진다. 묵묵히 좀 더 버티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