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핑 규정을 위반한 선수는 경기에 출전해서는 안 된다”는 김연아의 인스타그램 글에 18일 러시아어 댓글이 쏟아졌다. “당신은 훌륭한 선수지만 인간으로서는 아니다” “본인의 은메달(2014 소치 동계 올림픽)이 아직도 억울한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선수가 가엾지도 않나” “결백이 증명되면 어쩌려고” 등의 내용이다.
도핑 파문에 휩싸인 피겨 신기록 제조기 카밀라 발리예바(16·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가 17일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세 차례나 엉덩방아를 찧은 끝에 4위에 그치자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린 것이다.
이렇듯 발리예바는 혼자가 아니다. 경기 전부터 모스크바의 건물에는 발리예바의 대형 사진과 함께 “넌 혼자가 아냐”라는 글이 걸렸고 경기장에서는 연기를 마친 발리예바에게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물론 대부분이 ROC 선수단 관계자들이었다.
발리예바의 금지 약물 복용도 혼자 저지른 게 아니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반도핑 관련 기관들의 화살은 ROC 팀 닥터 필리프 슈베츠키와 발리예바의 코치인 예테리 투트베리제를 향하고 있다. 18일 CNN에 따르면 슈베츠키는 과거 러시아 조정 팀 닥터로 있을 때 도핑 규정을 위반한 전력이 있다. 징계까지 받았지만 2010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복권돼 피겨계로 스며들었다.
투트베리제는 러시아 피겨의 대모로 불린다. 2014 소치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의 율리아 리프니츠카야, 2018 평창 올림픽에서 은메달 2개를 딴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평창 개인전 금메달의 알리나 자기토바가 투트베리제의 제자다. 모두 15~18세의 어린 나이에 정점을 찍은 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리프니츠카야는 거식증과 부상이 겹쳐 19세에 은퇴했고, 메드베데바는 허리 부상으로 지난해 사실상 은퇴했다. 자기토바도 19세에 잠정 은퇴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온 유망주들이 투트베리제가 운영하는 모스크바 훈련장에서 오로지 기록 경신을 목표로 하루 12시간씩 고난도 점프를 연습한다. “(훈련을 통해) 더 잘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법”이라는 게 투트베리제의 지론.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실수를 연발한 발리예바를 투트베리제는 경기 직후 “왜 포기해버렸니” “왜 더 집중하지 않았니”라며 다그치기도 했다. 스승의 비뚤어진 욕심이 금지 약물 제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반도핑 기관들은 의심하고 있다.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러시아반도핑위원회(RUSADA)가 발리예바 건의 배후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WADA 회장은 이른바 ‘발리예바의 어른들’을 ‘악(惡)’ ‘킬러’로 규정하며 의사·코치의 금지 약물 제공 사실이 확인되면 영구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조사의 신빙성이다. RUSADA는 2012~2015년 러시아 정부 주도의 도핑 샘플 조작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 정부는 과거 러시아 주도의 도핑 스캔들을 계기로 새로운 반도핑법(로드첸코프법)을 2020년 통과시켰다. ‘미국 선수나 기업·방송이 참여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도핑에 연루된 개인이 적발될 경우 미국 정부 권한으로 형사처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 내부 고발자인 그레고리 로드첸코프의 변호인은 “발리예바의 경우도 러시아 주도 도핑 스캔들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며 “‘발리예바의 어른들’에게 로드첸코프법을 적용할 수 있다. FBI와 미국 법무부가 트레이너·의사·코치 등에 대해 이미 수사를 계획 중일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