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쟁 장기화로 국제 상품가격이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 스테그플레이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국제 정세가 이러니 암호화폐 가격도 덩달아 불안정하다.
국제 사회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중에서도 수십 년째 사실상의 ‘독재 통치’를 하고 있는 푸틴을 전쟁 원인으로 지목하는 이들이 많다.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러시아에 스위프트 배제 등 국제 규제가 가해졌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에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탈중앙화 정서가 강한 크립토 업계도 마찬가지다.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의 논리가 통용되는 곳임에도 푸틴 같은 강력한 독재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다. 동유럽의 명분 없는 전쟁 종료를 기원하면서 그동안 크립토 커뮤니티에서 벌어졌던 ‘명분 싸움’들과 그 영향을 정리해봤다.
지난 11일 코스모스 기반 크로스체인 스마트 컨트랙트 플랫폼인 주노(Juno)에는 독특한 거버넌스 제안(16번 제안)이 올라왔다. 특정 지갑을 보유하고 있는 고래 투자자가 소지한 코스모스 코인(ATOM)을 몰수해서 커뮤니티 풀로 가져오자는 내용이었다.
주노는 최근 ATOM을 들고 있는 만큼 주노 코인(JUNO)을 나눠주는 에어드랍을 실시했다. 한 지갑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JUNO 토큰은 5만 개였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고래 투자자가 가지고 있던 ATOM을 여러 개의 지갑으로 분산시켜서 한번에 JUNO를 200만 개 이상 가져가는 일이 발생했다. JUNO 코인 전체 유통량의 7%에 육박하는 물량이었다.
주노 개발 팀 ‘코어1(Core-1)’의 맴버인 울프컨트랙트(Wolfcontract)는 이를 파악하고 앞서 ‘4번 제안서’를 올려 제안서 4번으로 고래의 지갑에 있는 주노를 몰수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그러자 문제의 고래 투자자는 울프컨트랙트 측에 본인이 에어드랍 받은 물량을 네트워크 안정성을 위해 기여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코인을 무더기로 매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정 지갑에 있는 코인을 몰수하자는 ‘16번 제안서’가 올라오게 된 계기다.
16번 제안서는 금방 코스모스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제안 찬성파의 주장은 명확했다. 빨리 코인을 뺏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문제의 고래가 한 차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10분이면 탈중앙화거래소(DEX)에 존재하는 주노의 유동성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래가 사실은 오스모시스 등 다른 코스모스 플랫폼에서 유명한 일본계 다단계 조직인 CCN 벨리라는 주장도 나왔다.
커뮤니티의 반응은 엇갈렸다. 주노 커뮤니티 입장에서는 명백한 위기 상황에 해당하지만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반대 의견자들은 에어드랍이 사전에 주노 측이 명시한 방법으로 이뤄졌고, 고래 투자자는 그 규칙을 이용한 것 뿐이라는 이유를 댔다. 동일한 방식을 사용한 유저가 그 하나 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팀에서 실수를 해서 벌어진 일을 플랫폼 사용자를 마녀사냥 하는 식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반감들도 표출됐다.
결국 코어1 팀은 16번 제안서를 거절하는데 투표해달라는 트윗을 게시했다. 제안서가 급하게 작성됐으며 본인들의 탈중앙 원칙을 져버리는 꼴이라며 다수의 동의로 개인 자산을 조작하는 행위를 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한 것이다.
제안서 16번은 결국 거버넌스 투표 끝에 찬성 11, 반대 9의 비율로 통과됐다. 그러나 논란은 더욱 거세지는 모양새다. 주노 커뮤니티는 물론 코어1 팀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이 나뉘고 있다. 당분간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 전망이다. 이 사건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그동안 독선적인 행보를 보였던 주노 운영 측에서 앞으로도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오스(EOS)는 프로젝트 개발팀을 커뮤니티가 뒤집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오스는 지분증명 방식(PoS)을 선보이며 지난 2017년부터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프로젝트다. 문제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일반 투자자들에게 코인을 팔았던 개발사 블록원(Block.one)이 이후 제 3년 넘게 역할을 하지 않고 손을 놔버렸다는 점이었다. 코인 가격은 계속 하락을 거듭했다. 암호화폐 시가총액 10위 안에 들던 코인이 50위 밖으로 추락했다. 창업자 댄 라리머(Dan Larimer)는 지난해 1월에는 아예 블록원을 떠났다. 블록원이 보유하고 있던 EOS 코인을 시장에 대량 매도하려 했던 정황도 포착됐다.
참다못한 이오스 커뮤니티는 지난 12월 블록원에 향후 6년간 지급될 예정이던 6,700만 EOS를 지급 중단하는 내용의 거버넌스 제안을 통과시켰다. 슈퍼노드 투표를 통해 이뤄진 결정이었다.
줄 돈만 막아놓은 게 아니다. 이오스 재단 측은 지난 2월 블록원에 한화 4조 9,00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였다. 이오스 재단은 블록원에 이오스 개발에 대한 약속을 위반한 책임이 있으며, 청구받은 금액은 DAO 운영 비용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 업체인 다르마(Dharma)와 탈중앙화거래소 유니스왑(Uniswap)의 다툼은 크립토 업계에서 토큰 분배 정당성을 놓고 벌어졌던 첫 거버넌스 투표 사례로 꼽힌다.
내용은 이렇다. 유니스왑은 지난 2020년 9월 거버넌스 토큰(UNI)을 출시하면서 유니스왑을 사용한 이력이 있던 사용자 모두에게 토큰을 지급했다. 여기에는 유니스왑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스왑 기능을 제공했던 일부 지갑들도 포함됐다. 문제는 다르마 지갑을 통해 유니스왑을 사용했던 사용자 일부가 UNI 토큰을 받지 못하면서 발생했다.
다르마 측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니스왑 거버넌스에 비슷한 시기에 총 2개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첫 번째 제안서는 유니스왑 거버넌스 투표의 정족수를 전체 토큰의 4%에서 3%로 낮추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르마와 같은 지갑 플랫폼을 거치느라 토큰을 에어드랍 받지 못한 사용자들에게 UNI 토큰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올렸다.
사실 두 번째 제안은 커뮤니티가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지극히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먼저 제출된 제안서가 화를 불렀다. 당시 다르마는 1,500만 개의 UNI(초기 분배량의 2.5%)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안대로 정족수를 낮추면 다르마가 750만 개의 UNI만 확보해도 전체 유니스왑 프로토콜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다르마의 제안서 2개는 결국 모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부결되었다. 두 번째 투표에 참여한 인원들은 대부분 찬성표를 던졌으나, 첫 번째 제안서에서 불필요한 의심을 산 탓에 충분히 많은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투표를 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당한 명분이 있다고 해서 커뮤니티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례들은 향후 크립토 커뮤니티에서 벌어질 정치 행위가 상당히 고도화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가끔 상당히 역동적인 결정이 내려지긴 하지만 현재의 크립토 업계 커뮤니티나 거버넌스는 역사나 시스템적 측면을 볼 때 아직 걸음마 단계에 가깝다. 이더리움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은 2021년 8월경 지금의 ‘1원 1표’로 대표되는 지금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앞으로는 더 탈중앙성을 띄는 방향으로 점차 보완되어 갈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시대 정서상 가장 많은 토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결정을 독식하는 방식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적절히 제한하는 거버넌스가 인간 사회에서 더 정당성을 확보하기 쉽다는 통찰이다. 지금은 네트워크 속도나 안정성, 보안 등이 암호화폐 플랫폼의 가치를 측정하는 주요 척도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의 의사결정 방식이 플랫폼의 경쟁력이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