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끝난 우크라 곡물 수출 협상…"수백만 인질로 잡아"

터키-러시아 외무 회담했지만
러 '기뢰 제거-제재 완화' 요구에
우크라 "신뢰할 수 없어" 난색
유엔 "한 세대 중 가장 심한 생계비 위기"


터키가 중재에 나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흑해 곡물 수출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러시아가 수출길을 내주는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기뢰 제거와 서방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데 대해 우크라이나는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세계 밀 수출의 약 10%를 담당하는 우크라이나 수출길이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글로벌 식량 위기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양상이다.


로이터통신은 8일(현지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터키와 러시아 외무장관이 만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문제를 논의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자 러시아와 가까운 터키를 중재자로 내세운 이번 협상에서 극적 합의를 기대했으나, 추가 협상 문만 열어둔 채 뚜렷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합의 불발의 가장 큰 원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깊은 불신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선박들이 자유롭게 오데사(우크라이나의 최대 항구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면서도 우크라이나가 흑해 해역에 설치한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전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기뢰 제거 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선박을 공격할 위험이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AP통신은 유럽연합(EU) 내부에서도 러시아의 주장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기류가 짙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흑해 개방의 또 다른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는 ‘서방의 제재 완화’도 국제사회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카드다. 현재 서방은 러시아의 식량 수출 자체에 대해서는 제재를 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는 자국 선박과 은행에 대한 제재 탓에 곡물을 수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유럽의회에서 “우리의 대러 제재는 러시아의 식량 무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진실은 푸틴의 침략 전쟁이 식량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왼쪽) 러시아 외무장관과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이 8일(현지 시간) 터키 앙카라에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나 대화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는 서방의 비판을 의식한 듯 이날 자국이 점령하는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와 크름 반도에서 중동으로 곡물을 수출했다고 밝혔지만,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대부분 흑해와 면한 오데사를 통해 이뤄지는 만큼 식량난 해소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약 60만 톤의 곡물을 훔쳐 일부를 중동으로 수출했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꽉 막힌 곡물 수출길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면서 식량난 우려는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유엔은 이날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최소 한 세대 동안 볼 수 없었던 생계비 위기를 촉발시켰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루이지 디 마이오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과 식량 위기 대응책을 논의한 뒤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을 막는 것은 수백 만 명을 인질로 잡고 사형 선고하는 것과 같다”며 러시아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국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보고서를 인용해 7일 기준 전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식량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는 국가가 20개국에 달했다고 전했다. 수출 금지국은 지난달 26일 19개국에서 2주 만에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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