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테라의 암호화폐 ‘루나(LUNA)’와 스테이블 코인인 ‘테라USD(UST)’의 폭락으로 전 세계 암호화폐 시장이 흔들렸다. 한때 119달러(한화 약 15만 원)까지 가격이 치솟았던 루나는 하루아침에 0.005달러까지 폭락하며 한순간에 거품이 꺼졌다.
‘루나’ 사례와 같은 ‘버블 사태’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1634년 네덜란드에서는 사람들이 투기의 목적으로 앞다투어 튤립을 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튤립의 가격은 올라갔고 1636년 말~1637년 초 튤립의 가격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런데 1637년 2월, 갑작스럽게 튤립의 가격이 급하락했다. 최초의 버블 사태로 인해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대폭락을 피해 큰 이익을 얻게 됐을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튤립은 ‘세계 최초의 버블 사태’라는 오명을 얻게 됐을까.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적 안락감이 퍼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유럽의 직물 산업이 붕괴해 네덜란드 내 직물 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경제 호황 속에서 귀족을 따라 하는 것에 거금을 아깝지 않게 투자할 ‘신흥 부호’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이 투자처로 주목한 것이 바로 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튤립이었다. 튤립은 오스만 제국에서 활발하게 재배했는데 귀족들의 정원에 심겨 궁중의 꽃으로 사랑받았다. 신흥 부호 계층은 1634년부터 1637년에 걸친 기간 앞다투어 튤립 알뿌리에 투자했다. 하지만 튤립 알뿌리의 공급량은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가격이 올랐다. 부유한 고객들에게 직접 팔았던 튤립은 서민 계층에게도 투기 상품으로 인기가 많아졌고 경매를 통해 판매됐다.
당시 튤립 투기는 주식 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금이 낮아도 투자가 가능했기에 대안으로 인식됐다. 튤립 가격이 한창 고공 행진할 때는 희귀한 튤립 알뿌리 단 하나의 가격이 부자 상인의 연봉보다 훨씬 높았던 적도 있었다. 그 거품은 1637년 2월 하루아침에 꺼지고 말았는데 거품이 꺼지기 바로 직전 큰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네덜란드 알크마르 지역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던 7명의 아이 아버지, 보우테르 빈켈이었다. 그는 여인숙과 튤립 알뿌리 교역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튤립 열풍으로 평범한 여인숙 주인에서 지역 사회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거부가 된다. 어마어마한 재산인 튤립 알뿌리들이 그의 여인숙 근처 정원에 묻혀 있었지만 돈으로 사람의 수명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가 소유한 튤립 알뿌리의 가치는 올랐지만 그의 아내는 병에 걸려 1635년경 죽고 말았다. 당시는 전쟁, 궁핍, 짧은 평균 수명, 역병, 높은 영아 사망률의 시대였기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에 따라 빈켈은 홀로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다. 그는 튤립 알뿌리 거래에 더욱 매달렸다.
빈켈은 튤립 열풍이 확산하기 1~2년 전인 1635년에 이미 튤립을 거래하고 있었다. 튤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1636년이 되자 서로 다른 40여 개 품종의 70개가 넘는 질 좋은 튤립을 소유하게 됐다. 심지어 아드미랄 반 엥크호이젠, 비세로이 등의 희귀 품종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튤립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하자 선물거래도 일반화된다. 빈켈은 심지어 이 모든 튤립을 실제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재산 가치가 높게 평가됐다.
빈켈도 1636년 초여름 죽고 말았다. 그의 아이들은 보육원에 가야 했다. 당시에는 튤립 알뿌리를 지키기 위해 튤립 알뿌리 옆에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튤립에 대한 보호가 엄청났는데 빈켈의 튤립밭은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 것이다. 다행히 네덜란드 정부는 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그 시설은 체계적으로 관리됐다. 레헨트 이사회가 보육원을 운영했는데 아이들의 권리를 보전해줄 책임도 함께 지고 있었다. 빈켈의 튤립도 곧 수확기를 맞은 덕에 모든 튤립은 안전하게 수거돼 보육원의 안전한 장소에 보관됐다.
이때가 1636년 6월이었지만 판매 허가가 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훌쩍 지난 12월이었다. 빈켈의 알뿌리는 피테르 빌렘존이라는 원예가의 감독 아래 최종적으로 정식 판매 허가를 받았다. 실제 경매는 1637년 2월 5일에 열린다. 이날은 튤립의 거품이 꺼졌던 날이라고 알려진 1637년 2월 7일 바로 이틀 전이었다. 튤립의 가격이 최고조에 달했던 날이었다.
실재하는 다량의 알뿌리는 현금으로 거래됐다. 경매와 낱개 판매의 총액은 약 9만 길더에(한화 약 12억 5,650만 원) 달하는 금액이었다. 7형제가 똑같이 나눠 가져도 1인당 1만 3,000길더씩이나 되는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1만 3,000길더는 전형적인 장인 가족의 일 년 소득액의 4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들의 사연은 경매 당일에 나온 ‘1637년 2월 5일 최고의 입찰가에 팔린 튤립 목록’이라는 안내 책자에 적혀 널리 퍼졌다. 당시 튤립 투자자 중 대부분이 가격 대폭락을 예상하지 못해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7형제의 사연을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2022년의 루나 사태와 17세기 튤립 버블 사태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무조건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믿음에만 의지해 가격이 붙은 자산은 언제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