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 조사를 재개하라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요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과거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마약 범죄 소탕 작전으로 6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숨졌으나 현 부통령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가 그의 딸인 만큼 과거사를 덮고 국제기구의 개입에 반발하는 모습이다.
필리핀 정부는 8일(현지 시간) 성명을 내고 ICC가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어서 "이 사안은 반인류 범죄가 아니며 국가의 공권력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6년 7월부터 전국 단위의 마약 범죄 소탕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6000명이 넘는 용의자들이 사망했다. 경찰이 무장 용의자들을 대상으로 무력 대응이 불가피했다고 변명하는 반면 인권 단체들은 경찰이 마구잡이로 처형을 자행했으며, 대부분이 어린 소년을 포함해 마약과 관련 없는 가난한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2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ICC 검사실이 ‘마약과의 전쟁’ 관련 예비조사에 들어가자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해 조사 한 달만에 회원국에서 탈퇴했다.
이에 지난해 9월 ICC는 ‘마약과의 전쟁’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정식 조사에 나서겠다는 검사실의 요청을 승인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 정부 측이 11월 자체적인 조사를 진행한다며 유예를 신청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진상 규명이 연기된 상태다.
올해 6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마르코스 주니어와 그의 딸이 각각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 당선되면서 ‘과거사가 영영 매장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6월 말 카림 칸 ICC 검사장이 "필리핀 정부가 제대로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자 ICC는 필리핀 정부에 조사 재개에 대한 입장을 9월 8일까지 밝혀달라고 통보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초 마르코스 대통령이 취재진에 "ICC에 회원국으로 재가입할 계획이 없다"면서 비협조적 입장을 드러낸 데 이어 공개적인 거부 의사까지 밝혔다면서 “전임자를 독립수사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다만 ICC 규정에 따르면 회원국이었던 기간에 범죄가 발생했고, 해당 국가의 사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거나 정부의 조사 의지가 없을 경우 ICC에서 탈퇴했더라도 여전히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다음 주 시작되는 회기에서 필리핀 인권 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