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을 치료하는 최선의 방법은 수술이지만 많은 병원이 이를 회피하는 게 현실입니다. 의사나 병원 잘못이 아닙니다. 수술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의료 수가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죠. 돈도 안 되는데 힘들기만 한 일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런 환경도 만들어놓지 않고 의사들에게 ‘슈바이처’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뇌전증퇴치연맹(ILAE)에서 ‘최고업적상’을 수상한 홍승봉(63·사진)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겸 뇌전증지원센터장은 22일 서울 동자동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뇌전증 환자들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홍 센터장은 국가의료보험으로 의료비의 90%를 지원받는 산정특례제도 대상에 중증 뇌전증 환자들이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또 한국에서 처음으로 뇌전증지원센터를 설립하고 도움 전화를 시작하는 등 뇌전증 환자들의 치료와 지원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홍 센터장이 뇌전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환자들의 고통이 심하기는 하지만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치매나 파킨슨병 같은 다른 신경계 질환은 완치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계속 악화될 뿐이다. 그는 “치매 환자에게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행을 늦추는 것이 전부지만 뇌전증은 완치가 가능하다는 점에 끌렸다”며 “정상으로 돌아간 환자들을 보면 의사로서의 자부심도 느낀다”고 설명했다.
그는 뇌전증에 제대로 대응한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자살률’이라는 불명예도 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뇌전증 환자를 다룰 때 우울증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뇌전증 환자 3명 중 1명은 우울감에 빠져 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도 많죠. 그냥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우울증 치료는 뇌전증뿐 아니라 극단적인 선택을 막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문제는 우리 뇌전증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와 수술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공식적으로 36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40만 명을 훨씬 넘지만 수술을 받는 경우는 연간 100여 건밖에 안 된다. 연간 1000건 이상 수술을 하는 일본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도 많지 않다. 그는 “전국적으로 뇌전증 수술을 할 수 있는 곳은 6곳뿐이고 그나마도 제대로 수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부산에서는 최근 3년간 뇌전증 수술이 단 한 건도 시행되지 않았고 광주와 대구도 10년 넘게 ‘0’을 기록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술은 어려운데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뇌전증 수술을 하려면 머리에 구멍을 뚫고 전극도 삽입해야 한다. 그만큼 어렵고 힘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의료 수가는 턱없이 낮다는 게 홍 센터장의 지적이다. 인프라도 갖춰져 있지 않다. 뇌전증 수술을 하려면 신경외과나 소아과 등과 연락하고 일정을 조정하는 등 협조가 필수적이다. 전문 간호사가 필요한 이유다. 환자의 비디오 뇌파 검사 상태를 기록하는 뇌파 기사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문 간호사나 뇌파 기사를 갖춘 병원이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또 있다.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과 치료만 담당하는 병원 간 협조 체제도 마련돼 있지 않다. 홍 센터장은 “미국의 경우 수술은 전문 병원에서 하고 수술 전 검사와 수술 후 치료는 다른 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며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하지만 뇌전증 분야만 봤을 때는 한참 후진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호소한다. 전문 병원을 지정해 지원에 나서고 전문 간호사나 뇌파 기사 채용, 수술 로봇 도입 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 뇌전증 환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홍 센터장은 “뇌전증은 최소의 지원으로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라며 “국가가 제대로 지원하고 관리에 나선다면 뇌전증 환자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지금은 비상조치를 취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