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회계에 대해) 깜깜이 회계라고 한다. 전문적인 회계사를 두던가, 감사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현 제도상) 미비점이 있다.”(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정부가 조합원 1000명 이상 단위노조와 양대 노총 등 대형 노조의 재정 투명성에 대한 현장 전수 점검에 나서는 것은 일부 노조의 잇따른 비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노사의 자치 규율을 보호한다는 방침 아래 노조 활동에 대한 직접 개입에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더 이상 노조의 불법행위를 방치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일단 정부는 노조에 자율적으로 시정할 기회를 주고 재정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지원 제도를 추진하는 식으로 노조 재정 투명화에 나선다. 하지만 현 제도는 노조 재정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처벌 규정이 미약해 향후 입법 형태로 강행 규정이 마련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 장관은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노조 재정 투명성 관련 브리핑을 열고 “노조는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재정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는지를 두고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며 노조 재정에 대한 점검 이유를 설명했다. 고용부의 전수 점검 대상은 조합원 1000인 이상 단위노조를 비롯해 상급인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253곳이다.
이들 노조는 내년 1월까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따른 조합원 명부, 회의록, 재정 서류 등을 조합원이 볼 수 있도록 비치하고 보전했는지 점검 받는다. 고용부는 노조에 자율 점검을 하게 한 뒤 시정되지 않은 경우 시정 요구 및 과태료 처분을 할 계획이다. 이 장관은 “(역대) 정부가 현행법으로 할 수 있는 자율 점검 등을 안 한 것은 방치”라며 “(고용부는) 우선 현행 법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겠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전수 점검과 함께 노조의 재정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제도 뒷받침에도 나선다. 그동안 노조 회계는 회계 담당자인 회계감사원의 자격부터 노조 재정 공표 방법과 시기까지 대부분 노조 자율에 맡겼다. 제도를 통한 세부적인 절차적 규율이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이렇다 보니 해외 노조 회계제도나 시민단체가 요구받는 재정 투명성의 눈높이를 노조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심지어 현행법에서는 회계감사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만 회계감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 결과 노조 재정 투명성을 높인 대책은 1997년 노조의 재정 운용 상황을 행정관청이 요구할 경우 보고하는 제도 도입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고용부는 회계감사원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의 법령 개정과 일정 규모 이상 노조의 회계감사 결과 공표를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용부의 이번 노조 전수 점검은 이행 강제성이 약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부가 점검 후 위반 사항을 적발한 노조에 할 수 있는 제재는 500만 원 이하 과태료 부과뿐이다. 이번 대책에는 학계에서 요구하던 노조 재정 상황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아는 조합원의 노조 집행부에 대한 일종의 견제권 강화안도 담기지 않았다.
여당에서는 노조 재정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정부 발표가 있기 전 회계감사원 자격 강화, 대기업·공공기관 노조에 매년 감사 자료 의무 보고 등이 담긴 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입법에 속도를 더 내고 있다. 이 장관도 이날 “그동안 수차례 노사 관계의 법과 제도, 의식, 관행을 개선하자는 데 합의했지만 약속이 제대로 안 지켜졌다”며 “‘노조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마지막 요구라는 각오”라고 향후 관련 법과 제도에 강행 규정이 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노동계는 이번 정부 대책에 대해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는 노조 재정 투명화를 정부의 일명 ‘노조 때리기’의 연장 선상으로 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정부 여당에서 제기한 정부 지원, 회계 절차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사실과 다르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민주노총은 “노조는 자주성을 기반으로 노동 조건 개선이 목적인 조직”이라며 “노조의 회계감사권을 박탈하면 노조 자주성을 침해한다”며 하 의원의 노조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