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주요 언어를 다룬다는 한국외국어대만의 강점을 미래적 시각에서 재해석할 것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색깔을 다시 입히는 것이죠.”
박정운(62) 한국외대 총장은 4일 서울캠퍼스 총장실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학제 개편을 통해 한국외대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시대에 맞는 혁신과 변화를 이뤄내겠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박 총장은 한국외대에서 영어과 학·석사, UC버클리에서 언어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한국외대 영어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대외협력처장과 영어대학 학장, 한국외대 총동문회 사무총장, 해외동문연합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다.
박 총장은 올 3월 취임 1주년을 맞는다.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박 총장이 이룬 성과는 적지 않다. 취임 직후 서울-글로벌(용인)캠퍼스 간 유사 학과 구조 조정과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 학과 신설을 골자로 하는 대대적인 혁신 드라이브를 걸었다. 박 총장은 “지난 1년은 쉼 없이 달린 한 해였다”며 “취임하자마자 학제 개편과 함께 학과 신설, 행정 직제 개편을 논의하고 여러 규정도 재정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아직까지 학령인구 감소 여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주요 대학이 이처럼 과감하게 학제 개편에 나서는 사례는 드물다. 파괴적 혁신을 외치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려는 학과이기주의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한국외대도 오래전부터 구조 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돼왔지만 선뜻 추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박 총장이 취임 초부터 과감한 리더십으로 수십 년 묵은 학교의 숙원을 해결했다는 평가가 학교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물론 박 총장의 결단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다. 구조 조정 과정에서 학내 갈등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교원 등 학내 구성원들이 대학 발전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대승적 결단을 내려준 덕분이었다. 박 총장은 “모든 과정은 통폐합 대상 학과 교원들과 학생들의 고통 분담은 물론이고 학교 구성원 전체의 이해와 공감과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외대가 처한 녹록지 않은 현실과 혁신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구성원이 공감한 결과”라고 말했다.
박 총장은 남은 혁신 작업을 마무리해 학제 개편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당초 구조 조정하려 했던 글로벌캠퍼스 12개 학과 중 남은 4개 학과의 통폐합 작업을 완성할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확보한 정원을 활용해 학과 신설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학과 신설의 핵심은 ‘체질 개선’이다. 어문계열을 중심으로 특화돼 있다는 점은 한국외대만의 차별화된 강점이지만 이공계열을 중심으로 한 융복합 시대에서는 활동 영역을 제약하는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총장은 “한국외대의 전통적인 역할은 그대로 계승하면서 시대와 세계가 요구하는 방식의 창의적인 학제 간 융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복되는 학과를 줄이고 이공계와의 적극적 융합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학제 개편을 실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모든 전공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반도체 관련 전공과 AI 관련 전공 개설은 사실상 확정됐다. 특히 서울캠퍼스와 글로벌캠퍼스를 연결해 ‘AI융합대학’을 만든다. 박 총장은 “AI융합대학을 통해 학생들의 데이터 리터러시 능력과 컴퓨팅 사고력을 제고하고 외국학 데이터를 접목하는 창의 인재를 양성할 것”이라며 “반도체학과는 글로벌캠퍼스가 위치한 반도체 특화 도시인 용인시와 관산학 협력을 바탕으로 할 계획”이라는 구상을 밝혔다.
이 밖에도 문화와 기술을 융합하는 컬처&테크놀로지 전공 등 다양한 미래 지향적 융복합 학문을 검토하고 있다. 한류 아웃바운드를 AI나 데이터사이언스에 접목시킨 관광학부와 핀테크,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금융을 다루는 학과 등도 계획하고 있다. 모두 세계 각국의 언어와 지역 특성에 강한 한국외대의 특징을 접목시킨 것이 공통점이다. 박 총장은 “어문학과 지역학이라는 한국외대의 고유 가치와 이공학을 창의적으로 융합할 것”이라며 “다양한 전문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어 다니며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육 기반을 확충하겠다”고 말했다.
학제 개편을 바탕으로 서울·글로벌·송도 등 개별 캠퍼스의 특화 발전을 추진해 ‘하나의 외대’를 만들겠다는 게 박 총장의 궁극적인 목표다. 서울캠퍼스와 글로벌캠퍼스는 2014년 본·분교 통합으로 하나의 대학이 됐지만 유사·중복학과로 여전히 본·분교 체제가 유지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로 인해 같은 학교 학생임에도 차별이 발생하는 등 통합이 저해되는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박 총장은 “이번 학제 개편을 통해 대학 내 구성원 간 본·분교 정서를 타개하고 캠퍼스별 특성화 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서울캠퍼스는 어문·사회과학 중심의 다국어 데이터 기반 외국학대학, 글로벌캠퍼스는 △정보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 △생명공학 기술(BT·Bio Technology) △문화기술(CT·Culture Technology) 기반 실용학문 융합대학, 송도캠퍼스는 데이터 기반 첨단과학대학으로 특화 발전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박 총장은 국가가 교육을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대학들은 14년째 동결된 등록금과 답보 상태의 국고 지원으로 재정이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다”며 “학제 개편을 단행해 다양한 최첨단 융복합 학과를 설립하려는 한국외대도 첨단 교육 장비 도입에 많은 재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의지가 강한 만큼 고등교육 위기를 잘 풀어나가리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