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16~17일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열고 그간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조속히 회복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두 정상은 12년간 중단됐던 ‘셔틀외교’도 재개하기로 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관계 복원 조치도 여럿 이뤄졌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44개월 만에 해제했고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철회했다. 양국은 상호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 조치의 조속한 원상 회복에도 합의했다. 한일 간 군사정보 교류 체계인 지소미아(GSOMIA)도 완전 정상화하기로 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냉각됐던 한일 관계를 전면 복원하는 데 시동을 건 것이다.
그간 한일 관계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발목이 잡혀왔다. 이 문제의 발단은 해방 20년이 지난 1965년 6월 한일 정부의 국교 정상화와 청구권 협정 체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국은 청구권 협정을 맺으면서 일본이 한국에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고 ‘국가와 그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했다. 한국은 이 돈을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사용했다. 일본은 협정을 근거로 ‘배상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을 지금까지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국가 간 협상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느냐는 논란이 이어졌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2005년 한일 협정 외교문서를 검토한 끝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는 청구권 협정에 포함돼 해결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국내 법원도 관련 소송에서 이런 취지의 판결을 이어갔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에서 한일 관계를 뒤흔드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대법원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에 피해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이전 판결을 뒤집고 파기 환송했다. 당시 주심을 맡은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다. ‘법리’보다 ‘소신’을 앞세운 판결이라는 뜻이다. 또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행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사법 자제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이후 일본 기업의 재상고를 거쳐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판결을 최종 확정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에 반발해 2019년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와 함께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은 지소미아 중단 결정으로 맞대응했다. 역사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이 경제·안보 분야로 확대된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이달 6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의 해법을 선제적으로 발표했다. 일본 피고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대신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국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조성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이다. 포스코가 재단에 40억 원을 기부하는 등 배상금 재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자금으로 혜택을 받은 국내 기업들이 출연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가 ‘레드라인’으로 삼은 일본 피고 기업의 국내 자산 강제 현금화를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국제조약보다 국내 판결을 우선시한 문재인 정부와 달리 강제징용 배상은 조약으로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손을 사실상 들어준 셈이다. 이에 일본 정부는 환영의 뜻과 함께 ‘역대 일본 정권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16일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번 정상회담은 얽히고설킨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확실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며 “야당은 정상회담을 비판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를 뒤틀리게 만든 문재인 정부의 업보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의 협의·조율 단계부터 시작된 게 아니라 한일 관계를 우선 조기에 정상화하고 나머지 부분을 채워나가자는 윤석열 정부의 전략적 결단에 따라 이뤄졌다”며 “정상회담에 80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양국의 안보·경제 협력은 한층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한일 관계 개선은 그간 동북아시아 안보의 근간이 돼온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 강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와 중국·대만 간 군사적 긴장 고조,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 등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미일 안보 협력을 위해서는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연계할 한일 간 협력 관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람 이매뉴얼 주일 미국대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한미일 3국이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전략·억제력 영역에서도 협력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중국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우리 주력 산업인 반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예상된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이 반도체 산업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일본이 반도체 소재·장비를 공급하고 한국이 반도체를 생산하는 분업 구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정부와 업계가 전방위로 노력했지만 품질이 입증된 데다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일본의 소재·장비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전했다.
또 한일 기업 간 협력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한국·미국·일본·대만)’에서 상대적으로 한국만 소외된다는 우려를 불식할 필요도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는 최근 일본에 두 번째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공식화했고 미국에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일본의 8개 대기업이 모여 설립한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손잡고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반도체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윤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 양국 기업 간 공급망 협력이 가시화되면 용인에 조성될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기술력 있는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을 대거 유치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반도체 첨단 혁신기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일 관계 개선의 물꼬가 트였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앞으로 양국이 풀어가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갈라진 국민 여론을 통합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단기적으로는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15명 중 정부의 해법에 반대하는 분들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관건”이라며 “장기적으로는 22만 명에 달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등의 논의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신 전 대사는 “한국 정부가 정상회담을 서두르다 보니 국민 및 강제징용 피해자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며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전략적 결단을 한 이유를 국민에게 호소해 이해를 구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추가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의 결단에 일본 정부 및 기업이 어떤 식으로 호응할지도 변수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의 선제적인 강제징용 해법 제시에 일본이 화답해야 할 차례”라며 “기시다 총리는 추가 정상회담이나 방한 때 강제징용에 대해 똑 부러진 사과를 하고 일본 피고 기업도 한일 미래파트너십기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과거처럼 일본 정치인이나 관료의 망언이 나온다면 일본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는 만큼 일본 정부는 메시지 관리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한국 측의 기대와 일본 측의 호응이 크게 엇갈리면 한일 관계의 불안정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