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10곳 중 6곳은 내년 투자 계획이 없거나 아직 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관세 장벽 강화와 공급망 불안에 외환 변동성까지 겹치며 기업들이 비상경영에 돌입한 탓이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투자가 장기간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8일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59.1%가 내년 투자 계획을 아직 수립하지 못했거나 없다고 답했다. 세부적으로는 투자 계획을 정하지 못한 곳이 43.6%였고 계획 자체가 없다는 기업은 15.5%였다. 조사는 지난달 19일부터 24일까지 모노리서치가 진행했으며 응답 기업은 총 110곳이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투자 계획 미정’은 13%포인트 줄었으나 ‘없음’은 4.1%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불확실성 회피 심리가 강해지며 아예 투자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난 셈이다.
계획이 미정이거나 없다고 답한 기업 10곳 중 4곳은 조직 개편과 인사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37.5%)이라고 설명했다. 대내외 리스크 영향 파악이 우선(25%)이라는 응답과 내년 국내외 경제전망 불투명(18.8%)이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기업들이 경영 환경을 둘러싼 안개를 걷어내지 못해 의사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 방증이다.
투자를 결정했더라도 지갑을 열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내년 투자 규모를 올해와 비슷하게 유지(53.4%)하거나 줄일 것(33.3%)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86.7%에 달했다. 투자를 확대한다는 답변은 13.3%에 그쳤다. 기업들은 부정적인 내년 경제전망(26.9%)과 고환율 및 원자재가 상승 리스크(19.4%)를 투자 축소의 주된 배경으로 꼽았다. 내수 시장 위축(17.2%)도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기업들의 이 같은 위축은 공급망 불안과 환율 급등 그리고 경기 둔화라는 ‘트리플 악재’ 탓이다. 기업들은 내년 투자와 관련한 3대 리스크로 보호무역 확산 및 공급망 불안(23.7%)과 주요국 경기 둔화(22.5%)를 지목했다. 고환율(15.2%)에 대한 우려도 컸다. 미중 갈등이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이고는 있으나 언제든 관세 전쟁이 재발할 수 있어 ‘탈(脫)중국’ 등 공급망 재편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환율 변동성 확대는 기업 경영의 시계를 더욱 흐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올 4월 1482.9원까지 치솟았다가 3개월 뒤 1350원대까지 하락했다. 이후 다시 급등세를 타며 이달 5일 1475.5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널뛰는 환율은 자금 운용 계획 수립을 어렵게 만드는 주원인이다. 재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원화로 바꾸거나 국내 자금을 달러로 바꿔 투자하는 결정 모두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주요국 경기 둔화 경고음도 기업 심리를 얼어붙게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일 미국의 내년 경제성장률을 1.7%로 전망했다. 이는 올해 2.0%보다 둔화한 수치다. 중국 성장률 역시 올해 5%에서 내년 4.4%로 내려앉을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경제연구원도 이날 보고서를 통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불확실성을 리스크로 지적했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조기 종료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내수 부진 장기화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가계 구매력이 약화하며 소비 심리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은 투자 활력을 되살리려면 정부의 전방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투자 시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세금 및 각종 부담금(21.7%)을 1순위로 꼽았다. 노동시장 규제(17.1%)가 그 뒤를 이었다. 기업들이 바라는 최우선 정책 과제는 세제 지원 및 보조금 확대(27.3%)였다. 내수 경기 활성화(23.9%)와 환율 안정(11.2%)도 시급한 과제로 언급됐다.
미래 산업인 인공지능(AI) 분야 투자마저 위축된 상태다. 응답 기업의 63.6%가 AI 관련 투자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계획을 수립했거나(12.7%) 검토 중(23.7%)인 곳은 40%에도 못 미쳤다. 투자를 계획한 기업조차 절반 이상(55.1%)은 신사업 창출보다 생산 효율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공급망 불안과 외환 변동성 심화로 대기업 투자마저 위축되는 상황”이라며 “환율 안정 노력과 함께 첨단산업 세제 지원 등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