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2월 오후, 그린은 이틀 연속 현장에 나갔다. 18개월 전, 은퇴 후 한가한 생활을 마음 속으로 그리면서 전 대원 전용 세면실의 열쇠를 반납했을 때 그는 자기가 이렇게 바쁘게 지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아직까지 그의 집은 전기가 나가지 않았지만 한 동네에서 정전이 된 집들도 있다. 이번 달 가스 요금이 무려 200달러나 인상된 것도 걱정이지만 정작 두려운 시기는 올 여름이다.
전기 부족으로 고민하는 주는 지난 10년 동안 대형 발전소를 하나도 건설하지 않은 캘리포니아 뿐만이 아니다.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에서는 전기회사들이 생산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올 여름에 전기 공급 능력이 한계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여름을 무사히 넘겼다고 해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지난 10년 동안 전력 수요가 매년 2퍼센트씩 늘어난 점을 감안할 때 장기적으로 전력 수급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겨우 2퍼센트를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1년에 최소 20개의 발전소를 새로 지어도 늘어나는 수요를 빠듯하게 맞추기에 급급하다. 효율적이고 저렴한 방식으로 전기를 더 많이 생산한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시바삐 더욱 효과적인 배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하루 아침에 특효약이 나올 리는 없기 때문에 EPRI는 바람이나 태양 심지어 조류처럼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을 이용한 발전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에너지 다양화가 대세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한다. 다양한 전력원이 공존하면 온실효과와 대기오염을 낳는 공해 배출이 줄어들 뿐 아니라 생산 원가도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실현될 게 아니다. 그 전까지는 기존 발전소가 일정한 발열량으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가령 석탄을 떼는 화력 발전소는 최고 40퍼센트의 열효율을 기록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몇년 안에 60퍼센트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반면 천연가스를 쓰는 화력 발전소의 열효율은 이미 50퍼센트가 넘고 공해 배출량도 적다. 미국의 48개 주에는 앞으로 60년은 쓸 수 있는 천연가스가 매장돼 당분간은 천연가스가 중요한 연료로 쓰일 것이다.
화석연료가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가격 불안정의 문제와 이것을 태우는 데서 발생하는 환경 문제가 맞물려서 오래 전부터 뛰어난 경제성(킬로와트시 생산원가가 2센트)을 인정받았으면서도 무시되기 일쑤였던 원자력 발전에 새로운 활로가 트였다. 원자력 발전은 이미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발전기와 디지털제어시스템의 성능을 개선하면 기존 시설만으로도 금년에만 전기를 5퍼센트나 더 생산할 수 있다.
오는 2025년까지 전기회사들은 10,000-1,5000메가와트의 핵에너지를 추가 생산할 계획이다. 이것은 뉴욕 주 전체가 소비하는 전력과 맞먹는 양이다. 늘어난 전기는 크기가 현재 가동중인 원자로 중에서 가장 작은 원자로의 8분의 1에 불과한 소형 원자로에서 나온다. 앞으로 조립 공법을 이용해 발전 시설을 손쉽게 늘려나가는 기술이 개발되면 생산원가는 더 떨어질 것이다. 가격이 꾸준히 하락하는 재생가능 에너지의 전망도 밝은 편이다.
효율적으로 설계된 발전기 덕분에 풍력 에너지의 생산원가는 킬로와트시당 4센트로 떨어졌기 때문에 석탄을 이용한 화력 에너지에도 이에 지지 않는다. 풍력 발전은 미국 전체 가구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50만 호가 쓰기에 충분한 전기를 생산한다. 내년중으로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 경계 지점에 세계에서 가장 큰 풍력 발전 단지가 완공되면 7만가구분의 전기를 새로 얻게 된다. 태양열을 이용한 광전지는 아직 너무 비싸 보급이 더딘 편이지만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물론 재생가능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대한 풍력 발전 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소도 예외는 아니다. 또 바람과 햇볕은 바람이 불고 해가 쨍쨍 내리쬘 때만 가동할 수 있다. 수력 발전소는 연어의 이동을 막는다는 이유로 환경 단체의 반발을 사고 생물자원 발전소는 소량의 탄소를 배출한다.
대형 발전소를 짓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많은 소형 발전기에서 전기를 만든 다음 이것을 그리드로 집결시키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여기에는 소형 풍력 발전기, 지붕 위에 다는 태양집열판, 연료전지, 뉴욕시에 설치한 것과 비슷한 소형 가스 발전기 등 다양한 발전 설비가 동원된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런 ‘분산 전원’ 형식이 가까운 시일 안에 전기 공급 체제의 중추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지만 이것이 좀더 안정된 전력 체제를 수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리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분산 전원은 우리가 전기를 사고 파는 방식마저도 바꾸어놓을지 모른다고 EPRI의 예거는 말한다. 전력 시장의 규제가 완전히 풀리면 소규모 공동체들이 전기를 팔면서 대형 공장을 가진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전기계량기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대신 거미줄 같은 통신망을 통해 가장 전기료가 싼 공급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 거기서 가전용 전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집집마다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전기 공급자는 한 동네에 있을 수도 있고 천킬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기존의 송전망이 이 정도 용량이나 복잡함을 감당할 수 있게 설계돼 있느냐 하는 점이다. 새로운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곳으로 전기를 원활하게 보낼 수 있어야 하지만 지금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기존의 그리드는 자전거 바퀴축-바퀴살 모양의 네트워크로 짜여 있어 거대한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가 저항이 가장 적은 경로를 따라 흘러내려가도록 돼 있다. 스탈코프에 따르면 각각의 발전점(發電点)이 거대한 전력망 안에서 하나의 교점(交点)처럼 움직이는 ‘지능형’ 그리드 안으로 이 시스템을 통합시켜야 한다. 일종의 전기 인터넷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만만치 않은 공학적 사업이지만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고속도로망이 완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전력의 흐름을 정교하게 제어하려면 각각의 전선에 어느 정도의 전력을 실어나를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전선을 통해 흐르는 전기는 전선을 가열시키고 팽창시킨다. 그리고 지나치게 과열하면 결국 전선에 이상이 온다. 열은 거대한 송전탑 사이에 걸린 전선을 축 늘어지게 만든다. 전기회사는 전선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늘어질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이것은 기온과 습도의 영향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여유를 주려다보니 최대 용량의 60퍼센트밖에 전기를 실어나르지 못한다. 그러나 비디오 이완측정기라는 새로운 장치가 도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장치는 늘어진 정도를 끊임없이 측정해 컴퓨터제어센터로 데이터를 보낸다. 그러면 컴퓨터가 전선에 걸린 부하를 알맞게 조정한다. 결국 각 전선으로 보내는 전기의 양을 늘릴 수 있다.
전기 요동도 골칫거리 중 하나다. 전선을 스프링이라고 생각하고 그 스프링 한쪽에는 지역 공동체의 무게가 매달려 있고 또 한쪽에는 발전소의 무게가 매달려 있다고 가정하자. 전기 사용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들면 무게 균형이 안 맞아 스프링은 끊임없이 요동한다. 가변교류송전시스템(Flexible AC Transmission System: 일명 Facts)라는 새로운 기술은 전선의 전압을 높여 요동을 감소시킨다. 스탈코프는 “바이올린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전국 각지로 보내는 전력 흐름을 정교하게 제어할 수 있다.
송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손실도 큰 문제다. 송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기 일부는 열로 날아간다. 고온초전도라는 새로운 기술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 초전도체는 전기 저항이 없는 물질이다. 따라서 초전도체를 이용하면 전력 손실이 없다. 고온초전도 케이블은 가운데가 호스처럼 텅 비어 있다. 냉각 효과를 낳기 위해 속은 액화 질소로 채운다. 매사추세츠주 웨스트버로에 있는 어메리칸 슈퍼컨덕터의 존 하우 부사장에 따르면 장거리 송전은 몇년 뒤에나 가능하다. 일단은 기존의 도관을 통해 가느다란 케이블을 집어넣을 수 있는 도시 지역에 우선 배치된다. 어메리칸 슈퍼컨덕터는 최근 디트로이트 에디슨사의 시범 사업을 위해 30km의 고온초전도 케이블을 깔았다. 전기회사의 송전선으로 가설된 최초의 고온초전도 케이블인 셈이다.
배전망에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저장이다. 특히 재생가능 에너지로 생산하는 전기의 경우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 미국의 하루 일조량은 평균 6시간이다. 풍력 발전 단지의 전기 생산량은 바람의 강도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다양한 전력 공급원이 있다 하더라도 전력 수요가 공급 수준을 웃도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현재 전기회사는 관성저장 및 초전도자기저장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
관성저장장치는 발전기에 자이로스코프를 연결한 것이다. 전기회사는 남아도는 전력으로 플라이휠(관성 바퀴)을 1분에 최고 6만 번까지 돌린다. 전력이 필요할 때는 관성바퀴에 저장된 힘으로 발전기를 돌릴 수 있다. 고온초전도자기장저장장치는 전기 에너지를 초전도 코일 주위의 자기장에 저장한다. 전기회사는 필요한 전력을 바로 끌어낼 수 있다. 작년 위스콘신 퍼블릭 서비스사는 위스콘신주 북부 지역에 처음으로 이 장치를 가설했다. 이것은 변전소의 트레일러 부착 트랙터에 설치돼 있다.
새로운 기술을 서비스로 연결하려면 광범위한 연구 개발이 선행돼야 하지만 최근 들어 전기 산업의 연구 개발은 극도로 위축돼 있다. 현행법대로 하자면 발전소 하나를 지어서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15년이 걸린다. 자유경쟁체제가 아니어서 지역 전기회사가 일정수의 고객을 보장받았던 시절에는 그래도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에서 전기 시장을 자유경쟁체제로 개방했거나 개방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장기 투자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있다간 캘리포니아처럼 더 위험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워싱턴디시에 있는 에디슨 전기 연구소의 리처드 맥마흔은 “현재의 에너지 위기는 사람들에게 거시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촉발시켰는데 이는 환경, 에너지, 경제 정책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