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한 자부심의 근거를 알려주마!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연구 및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인 것.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보다는 법정 공휴일 여부에 더 관심이 많은 상태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증명보다는 감상적인 예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실 한글은 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자며, 제자원리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소리에 따라 기록하는 소리글자로 만들었으며, 우리 머릿속에서 인식하는 한글도 소리글자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한글은 소리글자 중에서도 문자의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소문자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값어치 있는 것 하나만 골라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는 한글을 꼽을 것이다.

숭례문(남대문) 대신 간송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을 국보 1호로 새롭게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근거는 무엇일까.

■ 한글은 글자마다 의미 있어

한글은 띄어쓰기가 발달된 언어지만 굳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다음 예를 보자.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대를 앞서간 천재 문학가 이상이 쓴 시 ‘오감도 제1호’의 일부다. 이 시는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기존 문법의 띄어쓰기를 무시했다. 일상의 가장 상식적인 질서를 거부한 셈이다. 하지만 시를 읽는데 무리는 없다. 그렇다면 영어를 이렇게 쓰면 어떨까.

“Tobeornottobethatisthequestion.”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햄릿’에 나오는 명대사다. 그런데 붙여 써놓으니 그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원문대로 띄어쓰기를 하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이란 햄릿의 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예다. 영어는 알파벳 철자를 하나씩 옆으로 늘어 쓰는 반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한데 모아 글자를 하나씩 만들고, 이 글자(음절)를 이어 쓴다. 한마디로 영어는 늘어쓰는 데 비해 한글은 모아쓰는 방식을 취한다는 얘기다.

한글은 글자마다 의미가 있어 띄어쓰기를 안 하더라도 대강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명사 전체의 70%가 한자어이고, 명사에 붙는 은·는·이·가 같은 조사를 쉽게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낼 때 글자 수 제한 때문에 대부분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보낸다. 또한 한글은 영어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정보가 더 많다. 이것도 모아쓰기의 장점이다.

우리 눈의 망막에 초점이 맺히는 곳에는 보통 6~10개의 글자가 들어온다. 따라서 똑같은 글자 수가 눈에 들어올 경우 한글을 읽을 때 영어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한국인은 우수하다’(Koreans are excellent)란 문장을 예로 들면 한글 문장은 전체가, 영어 문장은 Koreans만 한눈에 들어온다.


■ 머릿속에서도 소리글자로 인식

세종대왕은 한글을 소리에 따라 기록하는 소리글자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서 인식하는 한글도 소리글자일까. 이는 뇌의 일부가 망가져 글자를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 환자를 연구해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소리글자인 영어와 비교하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난독증 환자가 ‘책상’이란 글자를 읽으면 ‘책책…상상…책상!’이라고 발음한다. ‘ㅊ…ㅐ…ㄱ…’과 같은 방식이 아니란 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어권의 난독증 환자는 다르게 발음한다. 즉 알파벳 철자를 하나씩 나눠 말한다. 책상에 해당하는 단어인 ‘desk’를 발음한다면 ‘d…e…s…k…desk!’라고 말하는 식이다. 한글이 철자가 아니라 소리를 따라 기억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 머릿속의 국어사전은 시각적인 철자 모양이 아니라 발음 소리로 저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ㄱ,ㄴ,ㄷ’ 순으로 분류된 뒤 ‘ㅏ,ㅑ,ㅓ,ㅕ’ 순으로 나눠진 국어사전과 다른 방식이다. 고려대 심리학과 남기춘 교수팀이 단어를 인식할 때 ‘철자이웃’과 ‘음운이웃’에서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연구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한글은 화재로 전소된 숭례문을 대신해 새로운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을 만큼 우리가 선조에게 물려받은 가장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철자이웃은 한 단어와 철자 하나가 같은 단어이고, 음운이웃은 한 단어와 발음 하나가 같은 단어를 말한다. ‘반란’(‘발란’으로 읽음)이란 단어를 예로 들면 반구, 반도, 반대 등이 철자이웃이고 발달, 발표, 발명 등이 음운이웃이다.

남 교수팀은 36명을 대상으로 철자이웃과 음운이웃이 모두 많은 단어, 철자이웃은 많지만 음운이웃이 적은 단어, 철자이웃은 적지만 음운이웃이 많은 단어, 철자이웃과 음운이웃이 모두 적은 단어를 각각 17개를 제시하며 단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했다.

실험 결과 음운이웃이 많은 경우가 어휘 판단 시간이 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머릿속의 국어사전이 음운(소리) 정보를 바탕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으로 음운이웃이 많으면 그 이웃끼리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져 판단이 오래 걸리는 것으로 연구팀은 풀이했다.

또 연구팀이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단어가 뇌에서 음운 정보를 바탕으로 처리되는지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확인한 결과 측두엽을 비롯해 음운 정보를 처리하는데 관여하는 뇌영역이 활성화됐다. 특히 음운이웃이 많은 경우가 적은 경우에 비해 활성화 정도가 더 크게 나타났다.

세종대왕이 소리글자로 창제한 한글이 한국인의 뇌 속에도 소리글자로 깊이 박혀있다는 사실이 현대과학으로 밝혀지고 있는 셈이다. 한글날을 맞아 소리글자인 한글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글_이충환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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