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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새만금 ‘희망고문’

■송종호 정치부 차장

수정 2026-01-26 09:09

입력 2026-01-26 08:23

시골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밤하늘을 가르며 터지는 처음 보는 화려한 불꽃 앞에서 숨조차 쉬지 못했다. 1991년 11월28일. 이날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두터마을에 살던 아이는 멀리서지만 대통령의 얼굴도 봤다. 어른들은 세계 최대 간척지를 만든다고 했다.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 같았다.

새만금간척종합개발 기공식 순간이다. 1987년 대선에서 새만금 간척을 공약으로 내건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는 전남에서 한 자릿수 득표율(8%)에 그쳤지만 전북에서는 두 배 가까운 14%를 얻었다. 득표 성능이 입증되자 정권마다 새만금 개발 청사진은 창대해졌다. ‘대중국 교두보(김영삼)’ ‘환황해 경제권 전진기지(김대중)’ ‘산업·관광 개발(노무현)’ ‘동북아의 두바이(이명박)’ ‘한중 경협단지 조성(박근혜)’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 단지(문재인)’ ‘2차전지 특화단지(윤석열)’.

선거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지방선거를 4개월여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반도체다. ‘반도체 클러스터 새만금유치위원회’가 꾸려지고 서명 운동까지 시작됐다. 발단은 지난해 말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그는 “용인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입주하면 그 두 기업이 쓸 전기의 총량이 원전 15기, 15GW 수준이라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라고 했다.

호남 정치권이 바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전북지사 출마 채비를 마친 정치인들마다 “새만금 재생에너지로 신규 클러스터의 첫 팹(반도체 생산 라인)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기업들이 다 결정한다. 정부가 옮기라고 하면 옮겨집니까(21일 신년 기자회견)”라고 일축했다. 그런데도 지역 정치인들이 앞다퉈 새만금 유치 가능성을 시사하며 유권자를 계속 자극하고 있다.

소년이 40대 중반이 되는 동안 서두터마을은 콘크리트 아래 사라졌고 주변 산은 깎여 바다를 메웠다. 그 틈에 듬성듬성 풀이 자라났지만 물웅덩이는 그대로다. 그 물웅덩이에서 잼버리 행사가 열려 국제적 망신을 샀던 게 불과 2년 전이다. 방조제를 빠져나가지 못한 배들은 아직 마르지 않은 바다 위에서 세월과 함께 썩어가고 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정치권의 달콤한 약속이 남긴 결과다.

지금까지 새만금에 투입된 돈은 15조 원에 달한다. 이 자금이 생산적 금융으로 쓰였다면 전북은 물론 한국 경제도 전혀 다른 국면을 맞았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새만금개발청의 업무 보고를 받으며 “20~30년을 또 이렇게 애매하게 갈 순 없지 않나. 희망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새만금 사업의 본질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약속이 남긴 결과는 이미 충분히 확인됐다. 휘황찬란한 청사진을 반복해온 희망고문의 악순환을 끊어낼 유권자의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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