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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의 비밀

| 최규성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

수정 2026-01-28 22:32

입력 2026-01-29 07:01

지면 34면
최규성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 사진 제공=삼성서울병원
최규성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 사진 제공=삼성서울병원

등골이 서늘하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뒷자리 누군가의 눈초리가 비수처럼 등을 후벼 판다. 뜻 모를 미소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이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쾅 하고 울린다. 낮에 병원에서 환자로 만난 사람이다. 왜 나를 모른 체할까? 혹 내가 너무 무례했나?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기 시작했다.

“간수술까지 하셨는데, 관리하셔야죠, 술 드시면 안 되요, 저도 안 마셔요. ”

아!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친구와의 술자리가 아쉬워 2차를 넘어 3차로 이어지는 동네 순댓국집, 그리고 내 앞에는 놓인 녹색 병 2병. 그의 눈빛에 당황한 나는 “침착해”를 수 없이 되이고는, 적당히 오른 취기를 빌려 “반갑습니다. 다음에 볼게요” 실없는 웃음과 황망한 약속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30대 후반의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날 이후 술 때문에 고통받는 간을 갖고 계신 분들께는 같이 술을 줄이자고 할 뿐, 절대 술을 안 마신다는 둥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사성 간질환을 앓는 환자에겐 이거 하지 마시라, 저거 하지 마시라는 말 대신 “함께 식단을 관리하며, 체중을 줄여보자”고 한다. 나 또한 체질량지수(BMI)가 28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의사들끼리 하는 사담 중 가장 흥미진진한 소재는 비행기 안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한 승객이 몰래 비닐에 마약을 싸서 삼킨 후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위에서 비닐이 터지면서 심정지를 일으키는 바람에 동료 의사가 심폐소생술까지 한 사례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비행 중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건을 단 한 번 겪었는데, 그마저도 십 여명의 의사들과 함께 학회에서 돌아오는 항공편이라 딱히 나설 필요가 없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서서히 이동할 때 후배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의사를 찾는 방송이 나왔다. 후배일까 하는 걱정에 달려가 보니 그 앞자리에 계신 다른 병원 선생님이 쓰러진 게 아닌가. 그의 병명은 과음으로 인한 미주신경 실신, ‘술병’이었다. 다행히 잠시 안정을 취하고 금세 회복해 그 비행기는 다시 이륙할 수 있었고, 우리 모두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의사는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환자를 만난다. 나의 철없던 시절에 했던 가장 흔한 실수는 환자를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가끔 보호자로 병원을 방문할 때면 어린 의사일수록 자기보다 50년을 더 사신 우리 부모님을 가르치려 한다. 질병이라는 것이 개인의 잘못에 의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의사에겐 그를 단죄할 권한이 없다. 성실히 치료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환자들이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을 먹어야 좋아지느냐”다. 그러면 나는 “먹어서 좋아지는 게 아니라, 안 드시고 줄여야 좋아진다”고 답한다.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가 답답해 보일지 모르나, 일단은 노력하시라고 권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신년이 되면 수많은 의의 건강법이 매스컴에 소개된다. 추천할 만하고 배울 점도 많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의사도 병원을 벗어나면 시중에 파는 나트륨 많은 음식을 먹고, 술도 한잔하는 사람이다. 혹 맘에 들지 않는 명의들의 치명적 비밀을 알고 계시더라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참고로 나는 수많은 명의의 비밀을 알고, 지켜 주고 있다. 그들도 나를 지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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