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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명 말살’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서구, 권력 제한 덕에 안정·번영

美행정부가 법치·자본주의 훼손

권리침해 익숙해지는 사회로 변해

수정 2026-02-02 22:25

입력 2026-02-03 05:00

지면 31면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구가 직면한 위험은 유럽에서 진행 중인 ‘문명 말살’이라고 주장한다. 유럽이 위험한 이민정책을 통해 서구의 독특한 유산을 파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서구를 정의하는 특징은 부족이나 종교적 연대감이 아니다. 서구의 귀중한 성취는 국가권력의 제한이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 제정 이후 서구는 시민의 권리, 독립적인 사법부와 주권적인 교회 및 사유재산의 신성함을 통해 통치자들의 권력을 점진적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유산이 서구를 민주적이고 번영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또 이러한 유산 덕분에 서구는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권력이 법에 의해 제한됐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유로이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었고 기업들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었으며 시민사회는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 같은 전통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권리를 행사하던 두 명의 시민이 연방 요원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연방 요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관명이 표시되지 않은 차량을 타고 다니며 법원이 발부한 영장조차 없이 마구잡이 체포를 자행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과 몸으로 체감하는 현실은 권위주의적인 경찰력 행사와 제한받지 않는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보여주기식 행태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행정부는 경악스러울 만큼 공격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왔다. 법원 판결을 준수하는 데 늑장을 부리거나 사실상 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칠 만큼 시간을 끈다.

트럼프 행정부는 언론, 대학, 비정부 기관, 법률 회사와 심지어 민간기업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 전반에 전쟁을 선포했다. 대통령이 공갈·협박단체로 지목한 조지 소로스의 ‘오픈소사이어티파운데이션’을 비롯한 민간 기구를 조사하려는 법무부의 계획은 권력자의 눈 밖에 난 단체를 범죄 조직으로 낙인찍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불길한 징조다. 이는 미국 정치에 수입된 러시아의 논리로 비판자들을 조사하는 방식이다.

법조인들도 압력을 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정보 접근을 위한 변호사들의 보안 허가와 연방 건물 출입 제한 등을 통해 법률 회사의 목을 조르고 있다. 또 국가가 좋아하지 않는 로펌을 선택할 경우 적법 절차에 따른 보호가 조건부로 적용된다는 메시지를 전 국민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대학 역시 유례없는 규모로 조사를 받는 상황이다. 국가는 재정 지원을 무기 삼아 독립된 기관들에 정치적 양보를 강요하고 있다.

언론은 무분별한 겁주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협박에 직면해 있다. 언론 매체들이 줄소송을 당했고 국가의 규제권을 동원해 정권의 노선을 따르도록 언론사 사주를 압박하는 시도가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8월 한 연방 판사는 정권의 사주를 받은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비영리 미디어 감시 단체인 ‘미디어매터스’를 조사한 것은 정치적 보복처럼 보인다고 판결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경제 분야에서도 국가권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규칙 제정자라기보다는 거래 중개자이자 규율 집행자로서의 역할을 더 강조하고 있다. 공개된 기준에 근거한 재정 지원을 통해 작동하는 산업정책과 최고경영자(CEO)를 백악관으로 불러 정부 지침을 따르도록 하거나 권고하는 시스템 사이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다. 규제 당국이 기업을 향해 정기적인 승인·갱신이 해당사가 특정 정책을 채택하거나 포기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암시할 때 자본주의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후견인들이 흔드는 제도로 변질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서구를 마치 유물이 가득한 박물관인 듯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구의 진정한 강점은 제도에 있다.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 자애로운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이 제한된 지도자에 의해 보호되는 자유, 그리고 국가에 맞서더라도 이 같은 반대가 범죄행위로 취급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건강한 시민사회가 서구의 강점이다.

서구는 혈통 사회가 아니다. 서구는 권력이 제한되고 권리가 보호되며 강압에는 책임을 묻는다는 합의에 기반을 둔 사회다. 서구가 느끼는 최대 위협이란 너무 관용적이거나 개인의 권리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팽창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다른 모든 나라처럼 변질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문명 말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 말살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편안해하고, 미국 국민은 그런 정부와 함께 생활하는 데 익숙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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