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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 상장 규제에 모험자본 업계 위기감

비상장 기업 자금조달 난항 우려

수정 2026-02-09 10:15

입력 2026-02-09 03:15

한국거래소 서울사무소 전경. 한국거래소
한국거래소 서울사무소 전경. 한국거래소

상장 모회사가 비상장 자회사를 신규로 증시에 올리는 이른바 중복 상장에 대한 압박이 강해지자 비상장 기업에 투자하는 모험자본 업계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여당 의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중복 상장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고 상장 심사를 전담하는 한국거래소는 중복 상장에 대한 고강도 규제안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국내 비상장 기업 다수는 신규 상장을 전제로 투자를 받아왔기 때문에 기업공개(IPO) 규제 강화는 산업계 전반의 자금 경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복 상장은 사업 부문을 물적분할한 후 상장시키는 일명 ‘쪼개기 상장’ 외에도 유형이 다양하다.

9일 거래소와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거래소에 상장 예심을 청구한 66개 기업 중 21개(31.8%)는 심사를 자진 철회하거나 미승인 조치를 받았다. 증시에 입성하기 앞서 IPO 절차를 진행하려면 거래소 예심을 통과해야 하고,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기업 대부분은 공식적인 미승인 조치를 받기보다는 신청을 자진 철회하는 방식을 택한다. 거래소의 상장 예심 미승인율은 2021년 23.9%, 2022년 23.0%, 2023년 20.0% 등 20% 초반대에서 2024년 31.0%로 급등한 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통계는 증권사들이 피인수를 목적으로 설립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인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제외하고 집계했다.

중복 상장 규제 강화는 심사 미통과율을 끌어올리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예심을 자진 철회한 코스닥 상장 추진 기업 엘에스이는 이미 상장한 모회사 엘티씨 주주를 중심으로 반발이 강하게 일었고 오스코텍의 자회사 제노스코도 중복 상장을 둘러싼 논란 끝에 상장이 불발됐다. 오스코텍은 소액주주에 주주환원책을 제시했지만 여론을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증권사의 IPO본부장은 “최근 이 대통령이 앞장서 중복 상장 문제를 거론하면서 거래소가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라며 “1분기 내 발표될 예정인 중복 상장 가이드라인에도 당초 예정보다 고강도 내용이 담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소는 중복 상장 가이드라인 제정 작업에 착수해 있다. 그동안 중복 상장의 개념·유형·허용 여부를 두고 시장 내 혼선이 있어온 만큼 명확한 기준을 밝혀 시장 참여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중복 상장은 △모회사가 사업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물적·인적 분할해 상장시키는 경우 △법인을 신규 설립해 상장시키는 경우 △타 법인을 인수한 후 상장시키는 경우 등 유형이 다양하다. 모회사가 사업 회사인 경우와 지주 회사인 경우 특성에 차이가 있고 영업·경영 독립성, 주주 보호 장치, 모회사 연결 실적에서 자회사가 차지하는 비중 등도 각기 다르다. 이른바 쪼개기 상장은 핵심 사업 부문을 분할한 후 증시에 중복으로 올리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외 경우까지 광의의 중복 상장으로 볼 지가 변수다.

중복 상장 규제가 강화되면 IPO를 전제로 투자를 유치해온 비상장 기업들은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HL홀딩스의 자회사인 HL로보틱스는 약 500억 원 규모의 외부 자금 조달을 추진했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중복 상장 논란이 커지자 속도 조절에 들어섰다. IPO를 전제로 여러 비상장 기업에 투자한 IB 업계 내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다. 한 번에 많게는 수천 억 원을 투자하는 사모펀드(PEF) 운용사는 대기업집단 계열사의 상장 전 지분 투자(프리 IPO) 단계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관련 규제가 강화되면 투입 자금의 회수가 불확실해진다. 최근에는 비상장 주식 거래 활성화로 상장 추진 기업의 지분을 가진 소액주주도 많아진 상황이어서 이들의 손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IB 업계 관계자는 “규제 강화의 취지를 이해하지만 비상장 기업의 자금 조달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소액주주가 지분을 가진 비상장 기업도 많은 만큼 규제가 가져올 파급효과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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