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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 수묵화서 펼쳐지는 백제 연인의 비극적 사랑

■[리뷰] 뮤지컬 ‘몽유도원’

백제 설화 ‘도미 부부’ 모티브

국악 정가와 뮤지컬 음악 결합

바둑 대국 형상화 군무 압도적

한국적 미감·정서로 세계 도전

수정 2026-02-12 23:54

입력 2026-02-12 17:50

지면 33면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화선지에 번진 먹빛 산수, 달빛이 내려앉은 바다. 마치 수묵화가 펼쳐진 듯한 무대 위로 긴 소맷자락이 흩날리고, 국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진 선율이 객석에 드리운다. 전통 회화의 여백과 색채를 무대 언어로 확장해 지고지순한 사랑과 파멸적 욕망의 대립을 그려낸다.

창작 뮤지컬 ‘몽유도원’은 삼국사기의 백제 설화 ‘도미 부부’를 모티브로 한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1995년 작)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2002년 예술의전당에서 같은 소재로 제작된 뮤지컬 ‘몽유도원도’가 공연되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은 인물 내면의 갈등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무대와 음악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극은 백제 왕 여경의 악몽으로 문을 연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무대, 수묵으로 형상화된 괴물에 쫓기던 그는 한 여인을 만나 안식을 얻는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여인에 대한 감정은 깊어간다. 충신 향실을 통해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목지족 도미의 아내 아랑을 찾아낸다. 여경은 아랑의 입궁을 조건으로 내건 바둑 대국에서 도미를 꺾고 그녀를 궁으로 들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변치 않는 사랑을 목격한 순간 왕은 질투에 사로잡혀 도미의 눈을 멀게 한다. 절대 권력을 쥔 듯 보이지만 불안한 왕권과 비뚤어진 집착에 휘둘리는 여경, 그리고 모든 희생 속에서도 사랑을 지키려는 도미와 아랑의 대비가 극을 이끈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무대는 이러한 대립을 시각적으로도 구현한다. 도미와 아랑이 속한 마을은 한국화와 같은 풍경을 가진 ‘도원경’ 그 자체다. 비주얼 아티스트의 손길로 완성된 ‘프로젝션 매핑’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빚어낸다. 반면 궁궐은 단청 문양의 격자 기둥과 보로 구성돼 폐쇄적 긴장감을 뿜어낸다. 욕망에 사로잡힌 여경의 고립과 불안을 궁궐이라는 공간이 고스란히 드러낸다.

군무는 한층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무용 전공자가 포함된 앙상블 배우들은 목지족의 축제와 진혼제 장면에서 선을 살린 춤사위로 한국적 흥과 비극을 동시에 전한다. 특히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국을 형상화한 장면은 백미다. 흑과 백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바둑돌처럼 맞부딪히며 정적인 대결을 역동적 장면으로 치환한다. 완성도가 높은 장면이지만 군무의 완성도를 높이고 안무의 긴장감을 끌어 올리다면 작품의 시그니처가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음악은 ‘몽유도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다. 해금·대금·가야금 등 국악기와 서양 현악기, 드럼과 베이스가 결합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민요 선율과 뮤지컬 어법을 절묘하게 엮어 세 주인공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전달한다. 신승훈·성시경 등 대중 가수의 히트곡을 제조해온 양재선 작사가의 가사는 크로스오버 선율에 찰떡과 같이 달라붙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전달한다. ‘아랑’ 역에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윤주를 캐스팅한 점도 눈길을 끈다. 한국 전통음악 중에서도 판소리가 아닌 사대부들의 정가를 끌어와 뮤지컬 음악에 결합시킨 점은 세련미를 더한다.

이 작품은 아시아 작품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선보인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한 공연제작사 에이콤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한국적 소재와 미학을 전면에 내세우되, 보편적 사랑과 권력의 욕망이라는 동시대적 주제를 담는데 주력했다. 충분히 설득력 있으면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개성을 듬뿍 살린 웰메이드 뮤지컬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만 일부 서사의 밀도를 높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악역이지만, 이해와 연민이 가는 입체적인 악역으로 여경의 캐릭터를 보완하면 설득력을 한층 높일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것을 파멸로 끌고갈 정도로 여경이 꿈속의 아랑에게 집착하게 되는 심리적 동인 역시 부족해보인다. 공연은 이달 22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이어지며, 이후 샤롯데씨어터로 무대를 옮긴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제공=에이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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