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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 돈 많이 된다” 삼성·SK ‘HBM 대전’ 스트레스 받는다

삼성전자, HBM4 출하로 대대적 공세

최태원 SK회장은 젠슨 황과 ‘치맥회동’

AI시스템 1개당 HBM4만 5억 원어치

삼성·SK, AI 시장 두고 셈법 복잡해져

수정 2026-02-14 14:21

입력 2026-02-14 09:00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23년 2030 부산세계박람회 공식 리셉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23년 2030 부산세계박람회 공식 리셉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스트롱(Strong), 스트롱.”

‘기술의 삼성’ 역시 강합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12일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탑재되는 초고성능·저전력 반도체인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의 초도 물량을 출하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최초입니다. 2023년 이후 SK하이닉스에게 빼앗긴 HBM의 최초 공급자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2세대(HBM2)와 3세대(HBM2E)까지 점유율이 가장 높았던 우선공급자였습니다. 하지만 2023년 SK하이닉스에게 밀린 후 HBM3와 HBM3E까지 초도 물량조차 공급하지 못했습니다. 삼성전자의 HBM3와 3E에서 발열 문제가 발생하며 최대 수급처인 엔비디아가 물량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업계에서는 “삼성의 반도체가 수렁에 빠졌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전영현 반도체부문(DS) 부회장이 복귀한 뒤 “HBM의 과오를 되풀이 않겠다”고 선언했고 반도체 조직과 연구개발(R&D)의 대수술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하반기 HBM3E이 엔비디아에 납품되기 시작했고 차세대 AI 가속기에 들어갈 HBM4까지 초기 물량을 가장 먼저 내보냈습니다 . 역시 ‘1등 DNA’가 살아있는 조직은 회복도 남다릅니다.

업계 최고 성능의 HBM4 개발

“AI 반도체 제일 잘하는 애야”

삼성·엔비디아 모두 “굿 파트너”

12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세대 HBM(HBM4)을 양산 출하했다. 삼성전자
12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세대 HBM(HBM4)을 양산 출하했다.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왜 엔비디아의 HBM 주요 공급사로 재진입하는데 목을 멨을까요. 엔비디아는 AI가 학습하고 추론하는데 꼭 필요한 AI 가속기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추정하는 업체마다 다르지만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이 85~90%에 육박합니다.

세계 최고의 성능인 엔비디아의 최신 AI 가속기는 초고성능 반도체 HBM 위에서 구동됩니다. 가격도 엄청납니다. HBM4는 1개당 가격이 약 600달러(87만 원)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엔비디아의 루빈 그래픽처리장치(GPU) 1개에는 32GB(기가바이트) 용량의 HBM4 8개가 탑재됩니다. 심지어 차세대 AI 슈퍼칩·랙 시스템인 ‘베라 루빈 NVL72’에는 루빈 GPU 72개가 들어갑니다. 이 시스템에 필요한 HBM4만 총 576개 입니다. 시스템 1개를 구축하려면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10대에 해당하는 약 5억 원의 HBM이 필요한 셈입니다.

문제는 D램을 8~12단으로 쌓아올리는 최신 HBM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만이 만들 수 있는 제품라는 점입니다. 이 시장은 2023년 삼성전자를 제치고 우선공급자에 올랐던 SK하이닉스가 점유율 약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없이는 AI 가속기를 못 만드는 상황까지 온 것이죠. SK하이닉스에 의존할 수록 엔비디아의 가격 협상력을 낮아집니다.

이런 이유로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의 선전을 내심 응원해왔습니다. 지난해 10월 말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APEC) 참석차 한국을 찾은 황 CEO가 “삼성전자가 필요하고, SK하이닉스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와 경쟁을 해주면 가격 협상도 용이해집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HBM4를 개발하면서 경쟁사보다 앞선 기술인 6세대(1c)를 적용해 최고 의 성능을 내고 있습니다. 엔비디아가 “대화가 된다, 대화가 돼” 수준을 넘어 “예술이야, 쟤 챔피언 급이야”를 말할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고객사인 엔비디아 기술진의 ‘피드백’이 큰 도움이 된 걸로 알려졌습니다. 삼성전자와 엔비디아, 서로 ‘굿 파트너’ 입니다.

삼성전자, HBM4 공세에

SK하이닉스 “스트레스 받을 거야”

지난해 10월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5’에 마련된 SK하이닉스 부스에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 실물이 전시돼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5’에 마련된 SK하이닉스 부스에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 실물이 전시돼있다. 연합뉴스

HBM4의 성공으로 삼성전자의 자신감은 대단해보입니다. 한 익명의 취재원은 “HBM4, HBM4E, 5, 6, 7까지도 결국 삼성전자가 다 정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삼성전자는 HBM4의 납품이 결정되기도 전인 지난해 10월 이미 미국에서 차세대 제품인 7세대 HBM4E의 동작속도(13Gbps)를 업계 최초로 제시했고 지난달 29일 진행된 콘퍼런스콜에서 “HBM4 16단 적층 패키징 기술을 양산 가능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달 출하된 HBM4 12단은 물론 16단, 그리고 다음 세대인 HBM4E까지 기술을 확보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외로 전해지는 메시지는 더욱 대담합니다. 11일 송재혁 삼성전자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술력으로 대응하던 삼성의 원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봐달라“고 강조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의 HBM 점유율이 삼성전자의 전략에 달렸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D램 생산능력(캐파)가 SK하이닉스보다 앞서는 삼성전자가 HBM을 많이 생산하기로 마음 먹으면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을 금방 잠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엔비디아에 납품되는 HBM3E 제품은 SK하이닉스가 약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HBM4부터는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50%대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시장의 상당 부분을 삼성전자에 뺏기게 됩니다. SK하이닉스가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거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HBM 점유율 높이면 D램 판매 줄어

세게 나올 수록 ‘부드럽게 체력전’

SK “삼성, 잘 때 생각 많이 날거야”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그런데 SK하이닉스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삼성전자가 “내가 최고”라고 외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SK하이닉스가 HBM 시장 1위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SK하이닉스도 이달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4를 납품합니다. 심지어 삼성전자보다 한 세대 낮은 공정(1b)를 사용하고도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동작속도(11Gbps)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누가 며칠 먼저 납품하는 관계가 없다는 듯 보고 있습니다. 어차피 가장 많은 물량은 SK하이닉스가 넣는다는 것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삼성전자의 HBM 공세 와중에 조용히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치맥회동’을 하는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자신감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한국식 호프집 ‘99치킨’에서 가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찬회동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신간 ‘슈퍼모멘텀’을 펼쳐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한국식 호프집 ‘99치킨’에서 가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찬회동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신간 ‘슈퍼모멘텀’을 펼쳐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HBM4 시장 일부를 삼성전자가 가져가도 좋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업계는 SK하이닉스의 대응을 두고 속내가 삼성전자와 완전히 다르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HBM4에 집중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큰 시장은 범용 D램 시장입니다. 삼성전자의 올해 매출 전망을 보면 전체 D램 매출(약 180조 원)에서 HBM 매출 비중은 많아도 15%, 약 27조 원 규모 입니다.

D램 시장은 SK하이닉스(웨이퍼 기준 월 62만장)보다 캐파가 큰 삼성전자(73만장)가 1위 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현상(쇼티지)로 D램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습니다. D램 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1월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8Gb의 고정가격은 개당 1.3달러였는데 지난 1월 말에는 11.5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분기별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 사진=카운터포인트리서치
분기별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 사진=카운터포인트리서치

SK하이닉스는 행보를 보면 삼성전자와 달리 범용 D램 시장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HBM은 D램 웨이퍼를 12단으로 쌓아올려서 만드는 제품입니다. D램을 적층하는 과정에서 불량품도 많이 나옵니다. 이른바 ‘수율’입니다.

지난 3년 간 엔비디아의 우선공급자로 HBM을 만든 SK하이닉스는 수율이 9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HBM 수율은 60~70% 사이로 파악됩니다. 삼성전자가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HBM을 많이 만들 수록 폐기되는 D램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없어서 못파는 D램을 대량으로 버려야 하고 공급 물량도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SK하이닉스로서는 HBM을 덜 만들고도 더 많은 D램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열립니다. “상대가 세게 나올 때 기술적으로 부드럽게 체력전으로 가는 거야” 전(前) UFC 선수 김동현에게 전략 코칭을 받은 걸까요.

두 회사의 앞날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삼성전자가 HBM 생산 수율을 높여 HBM과 D램 시장 모두 1위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D램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대전’. 뺏기는 점유율과 버려지는 D램, 요즘 밈(meme)대로 누가 잘 때 생각이 많이 날까요. 상반기 실적이 나오면 답이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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