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된 조각, 문신의 화(和)
[음악이 흐르는 미술, 미술이 깃든 음악]
한국의 조각, 독일의 음악 되다
바덴바덴 음악가들 문신에 헌정
‘배려, 조화, 화합’ 전하는 메시지
입력 2026-02-18 14:14
2021년 가을, 조각가 문신(文信·1923~1995)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음악회가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날 문신과 인연이 깊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조각가가 생전에 좋아했던 작곡가인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4번을 협연했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는 특별한 곡이 연주되었는데, 안드레아스 케어스팅(A. Kersting)의 관현악곡 ‘엘레온싯(Eleonthit)’과 보리스 요페(B. Yoffe)의 ‘달의 하나됨과 외로움’이라는 작품이다. 두 곡 모두 독일의 음악가들이 한국의 조각가 문신에게서 영감을 받고 그를 오마주해 작곡했다. 이 음악들은 과연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독일 월드컵이 개최되면서 다양한 부대 행사들이 열렸다. 그 일환으로 바덴바덴에서는 피카소, 샤갈 전시와 함께 이전 월드컵 개최국의 예술가로 문신을 선정해 도심 미술관과 야외공원에서 ‘문신 인 바덴바덴’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는 바덴바덴시와 마산시, 그리고 문신미술관의 협력으로 이뤄졌고 문신의 대표 작품들이 아름다운 도시의 대기와 어우러졌다.
당시 전시작 일부는 국립 바덴바덴 오케스트라 연습실 앞에도 설치돼 이 곳을 지나는 수많은 음악가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악장 이데우에가 있었는데 그는 동경예술대 출신으로 같은 학교를 나온 문신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제안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함께 전시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음악회가 즉흥적으로 기획됐다. ‘문신 추모음악회’에서는 문신의 16년 프랑스 생활을 기억하고자 라벨의 ‘파반느’, 동시대 예술가였던 작곡가 윤이상의 곡 ‘피리’, 그리고 문신이 고향을 배경으로 평소 즐겨 불렀다는 가곡 ‘가고파’ 등이 연주됐다.
연주회는 이듬해 ‘문신미술영상음악축제’로 이어졌다. 국립 바덴바덴 오케스트라는 170여년 역사의 유서깊은 악단이다. 브람스를 비롯하여 베를리오즈, 오펜바흐, R.슈트라우스, 마스카니 등이 이 오케스트라를 거쳐 갔다. 그들은 당시 다양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모색과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년도 추모음악회의 감동을 쉽게 잊지 않고 문신이라는 예술가를 중심으로 미술과 음악이 만나는 국제적인 행사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오롯이 예술의 내적 힘들이 작용하여 만들어낸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이 축제에서는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 브람스의 ‘교향곡 2번’과 함께 독일의 젊은 작곡가 케어스팅의 문신추모곡이 초연됐다. 바덴바덴은 슈만의 도시로 명명될 만큼 슈만의 흔적이 깃든 곳이고, 그를 찾아왔던 브람스가 훗날 살았던 집이 보존돼 있다. 음악사 속 애절함이 묻어있는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의 이야기는 이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음악적 향취가 짙게 배어있는 이 곳을 함께 호흡하는 음악가들이 문신의 작품에서 한결같이 멈추게 된 것은 분명 그의 조각을 통해 장르를 초월한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케어스팅은 문신의 작품을 음악으로 재탄생시켰다. 흔치 않은 형태 속에서 느껴지는 유연함과 우아함, 긴장감이 넘치는듯 하다가도 조화롭게 펼쳐지는 문신의 조각은 작곡가가 지향하는 음악과 맥을 같이했다. 조각 작품은 소리가 되어 공간으로 퍼져갔다. 또한 이 음악회를 위해 ‘앙상블 바덴바덴’이 창단되었고, 다국적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앙상블 시메트리’가 탄생했다. 대칭과 균형을 의미하는 ‘시메트리(Symmetry)’는 문신 예술의 핵심 개념이다. 이 앙상블은 창단 이후 지속적으로 문신의 작품세계를 음악으로서 알리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모색하고 그 정신을 견고히 했다.
2008년 앙상블 시메트리는 20세기 거장 볼프강 마슈너(W. Marschner·1926~2020)가 문신을 위해 작곡한 작품 ‘예술의 시메트리’를 한국에서 초연하도록 구심점 역할을 하며 미술과 음악을 하나로 엮어냈다. 현대음악의 거장인 마슈너는 그의 음악 속에서 문신 조각의 금속 표면에서 빛이 반사되어 자아내는 무지개 빛을 표현하고자 워터폰 등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소리를 함께 울리도록 했다. 그는 또한 문신의 예술은 인간의 품위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하며 한국으로 연주를 떠나는 단원들에게 여덟 명 모두가 문신의 조각과도 같으니 자긍심을 갖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음악가들이 문신의 작품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작품 속에 담겨있는 배려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화음의 동의어로 읽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그들은 우리가 공존하고 상생하기 위해서는 화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문신의 조각으로 체화했던 것이다. 이는 미술과 음악의 결합이자 국적을 넘어선 동서양의 융합이기도 했고 시대를 초월한 이음이기도 하다.
문신은 유년시절을 마산에서 보냈고 파리에서 오랜 시간을 활동한 이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 세계적인 조각가로 귀국한 문신은 자신에게 영감이 되었던 풍광을 품어낸 곳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미술관을 설립했고 1994년 개관하였다. 이후 고향을 아끼는 마음으로 2003년 시에 미술관을 기증하였다. 문신미술관이 그의 예술혼과 숨결이 가득 담긴 이유다. 미술관 언덕에 서 있으면 이 땅에서 외로이 살다간 조각가에게 헌정된 요페의 곡 ‘달의 하나됨과 외로움’이 떠오른다. 마치 달빛처럼 수많은 영감으로 끝없이 차오르는 듯하다. 문신 영문의 moon과 달의 의미를 연관시킨 이 곡은 진정 예술가의 고뇌와 고독을 잘 표현해냈다.
예술가의 삶 속에는 곳곳에서 그들을 발굴하고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다. 문신의 가치를 알아본 바덴바덴의 음악가들을 떠올려본다. 그 첫 만남에 관하여. 그날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계속해서 어긋나는 밸런스를 조율하다가 연습실 앞 조각에 시선이 멈추고 영감이 떠오른다. 작품 ‘Unity·화’의 형상은 두 개의 음표로 다가오며 음을 같이 내려면 서로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화음이라고. 20년 전 바덴바덴의 음악가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조각에서 배려의 미학을 깨달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문신의 ‘화(和)’가 구현되는 순간이다.
▶필자 김보라는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서울시미술관협의회 회장이며 ICOM 한국위원회와 (재)내셔널트러스트의 이사이고, 서울시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심의위원 등을 맡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했고, 경기도미술관에 근무하며 건립 TF 및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국내외 전시기획과 공립미술관 행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2009년 자치구 최초로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을 거쳐 2012년부터 지금까지 관장을 맡고 있다. 윤중식·서세옥·송영수 등 지역 원로작가의 소장품을 확보해 문화예술 자산에 대한 연구 기반을 확장했고 예술가의 가옥 보존과 연구를 기반으로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을 개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박물관 및 미술관 발전유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오늘의 연재
더 많은 연재오늘의 이슈
더 많은 이슈-
276개
-
491개
-
18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