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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국 연대와 한일의 봄

미중 ‘힘의 정치’ 압박 속 한일 관계 호조

협상력 높이고 생존 위한 전략적 판단

대안적 ‘제3의 길’도 기본은 ‘자국 우선’

소통·갈등 제어 노력으로 ‘윈윈’ 이뤄야

수정 2026-02-18 23:57

입력 2026-02-19 06:00

지면 30면
신경립

신경립

논설위원

신경립
신경립

지난해 9월 27일 당시 일본 자민당 총재 유력 후보였던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은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의 날’ 행사에 “당당하게 장관이 출석해야 한다. 눈치볼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시마네현이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에 여는 이 행사는 한일 긴장과 갈등의 불씨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13년 연속으로 차관급 정무관을 행사에 파견하고 우리 정부가 항의하는 일이 반복돼왔다. 이것도 모자라 장관급 행사로 승격을 강행한다면 한일 관계 악화는 불가피하다. 극우 성향의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열리는 올해 행사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일단 다카이치 총리는 자신의 공언과 달리 예년처럼 정무관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반길’ 일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다카이치 총리가 한일 간 우호적 분위기를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지금 한일 관계는 봄의 길목에 놓였다. 올 초 이재명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나라를 방문한 데 이어 3월에는 이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의 한일 정상회담 개최가 조율되고 있다. 정상 간 ‘셔틀외교’가 정착함에 따라 국민들의 인식도 눈에 띄게 호전됐다. 일본의 한 언론 단체에 따르면 일본에 호감을 갖는 한국인은 56.4%로, 조사 개시 이래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 조사’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호감도는 7년 만에 2배 이상 높아진 42.2%를 기록했다.

과거 반일 공세에 앞장섰던 이 대통령과 극우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다카이치 총리의 친교를 진정한 ‘케미’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한일 관계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판단의 산물로 봐야 한다. 동맹에도 가차 없이 관세로 위협하고 안보를 인질 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공급망을 앞세워 강압적 대외 정책을 펴는 중국 사이에서 한일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사이다. 미국 외교 매체 디플로맷은 “역사적 앙금이 공동의 지정학적 필요성에 의해 밀려났다”고 표현했다.

처지가 비슷한 두 중견 국가의 협력은 트럼프 대통령이 뒤엎은 국제 질서에서 필수가 된 생존 전략이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최근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가 무너졌다”며 ‘영향력 있는 제3의 길’을 만들기 위한 중견국 연대라는 화두를 던져 각광을 받았다. 유럽연합(EU)은 인도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데 이어 호주와도 FTA를 재추진하고 있다. 캐나다와 프랑스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병합 위협을 받는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에 나란히 외교공관을 열어 강대국의 일방주의를 막기 위한 연대의 제스처를 보였다. 우리나라도 여러 중견 국가들로 외교 보폭을 넓히고 있지만 가장 높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은 일본이다. 미국 의존도가 높고 자원 빈국인 한일 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돈로주의’와 관세 압박,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유독 취약하지만 높은 기술력과 지정학적 중요도가 높다. 힘을 모아 협상력을 높이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해 국익을 지켜낼 수 있다.

물론 과도한 희망을 걸고 ‘제3의 길’에 매달리는 것은 위험하다. 힘의 논리와 자국 우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연대의 이상은 저마다의 전략적 이익과 대외 변수, 국내 정치라는 현실적 여건에 따라 언제든 흔들리고 깨질 수 있다. 지금은 순풍을 탄 한일 관계도 다카이치 총리가 개헌을 통한 ‘보통국가’ 회귀에 속도를 내고 역사 문제에서 엇박자가 드러나는 순간 냉기류에 휘말릴 수 있다.

뭐든 미국이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치우치는 것은 더 큰 외교적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달라진 국제 질서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지켜낼 자강력을 키우는 한편으로 대미 협상력을 높여 국익을 지키면서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을 필두로 한 중견국 연대는 이를 위한 유효한 지렛대다. 한일 협력이 지속적인 연대로 이어지려면 긴밀한 소통과 상호 노력으로 갈등 요인을 사전에 제어해야 한다. ‘한일의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우선은 22일 ‘다케시마의 날’에 다카이치 총리의 미래지향적 판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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