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한국 국채 살 수 있나요” 오일머니·패밀리오피스까지 러브콜 [Pick코노미]
■韓투자 늘리는 싱가포르
韓 국고채 신용·수익률 다 갖춰
중동계 은행, 유럽 운용사 거래↑
수정 2026-03-09 18:29
입력 2026-03-09 05:30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오전 7시 싱가포르 마리나베이금융센터(MBFC) 앞에 다다르자 동이 트기 전부터 빌딩 일부 층에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과거 이곳의 트레이더들은 전날 밤 미국장을 분석하거나 일본·중국 시장을 일찍 점검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사무실 불을 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을 분석 대상에 포함시키는 트레이더들이 부쩍 늘면서 출근 시계도 덩달아 바뀌고 있다. 한국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앞두고 한국 국채 포지션을 늘리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면서다. 아시아 채권 시장에서만 12년을 일한 한 헤지펀드 매니저는 “한국 국고채는 지난해가 첫 투자”라고 했다.
레오 테이 ING은행 아시아태평양(APAC) 트레이딩 총괄은 이런 변화를 “참여자의 질이 달라졌다”는 말로 요약했다. 과거에는 원화 시장에 접근하려면 서울 지점을 두거나 별도의 투자 계좌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최근 각종 제도 개선으로 투자 문턱이 낮아지면서 연기금·보험사 같은 장기 투자자, 이른바 ‘리얼 머니’ 유입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테이 총괄은 “유럽·중동 고객들은 5~10년물 한국 국채를 선물환과 결합해 환 위험을 줄이면서 매입하는 방식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 약화도 자리 잡고 있다. 재정적자 확대로 미국 국채의 안전자산 매력이 예전만 못 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다. 달러 대체 자산을 찾는 움직임이 커지자 한국 국고채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시장 참가자들은 “신용도와 수익률을 함께 갖춘 자산은 드물다”며 한국 국고채의 희소성을 높이 평가했다. 유럽계 공적 자금이 먼저 물꼬를 텄고 뒤이어 중동 오일 머니가 유입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계 은행들도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1년간 현지 기관들과의 접점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 조정민 지점장은 “대형 외국 금융기관들은 그동안 한국계 은행을 국채 거래 파트너로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며 “지난해에는 우리 존재를 알리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말했다. 끈질긴 세일즈는 성과로 이어졌다. 조 지점장은 “중동·유럽계 은행 2~3곳과 연간 조 단위 국고채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전했다.
중동계 자금만이 아니다. 싱가포르 금융가의 큰손인 패밀리오피스도 한국 자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현지 등록 패밀리오피스는 약 2000개로 2020년 400개에서 5년 새 5배로 늘었다. 그동안 복잡한 환전·결제 절차가 이들의 발목을 잡아왔지만 최근에는 한국물을 찾는 투자자들이 부쩍 늘었다는 게 현지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러한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하나은행은 지난해 한 자산운용사와 손잡고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자금을 한국 국고채 등에 투자하는 전용 펀드를 출시했다.
산업은행 싱가포르지점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지점 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데스크는 글로벌 PF 사업주들이 한국 해상풍력 등 국내 대형 프로젝트에서 원활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금융 자문을 제공하는 한편 아시아 시장 진출을 추진하는 국내 기업의 현지 금융조달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최대 큰손인 글로벌 채권 운용사도 속속 한국물 확보전에 참여하고 있다. 약 8조 원 규모의 한국 기관 자금을 운용하는 웨스턴자산운용은 최근 한국 국채에 대해 ‘비중 확대’ 포지션을 유지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김원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한국으로의 자금 유입이 여기서 멈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 들어올 자금은 더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한국 국고채 시장에는 약 27조 원이 순유입됐다. 그러나 웨스턴자산운용이 추산한 WGBI 편입 예상 유입액은 500억~600억 달러(74조~89조 원)에 달한다.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을 제외하면 한국 10년물 금리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점도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지금까지의 유입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다만 국채로 유입된 자금이 공사채와 우량 회사채 시장으로까지 번지려면 제도 정비가 더 필요하다. 한국 국고채의 비과세는 분명한 강점이다. 하지만 비정부채에 남아 있는 세금 문제와 공고 후 20분~1시간 안에 끝나는 ‘번개 입찰’ 구조는 여전한 장벽이다. 현장에서 만난 투자자들은 특히 짧은 입찰 시간을 가장 큰 부담으로 꼽았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본사 내부 승인을 받기에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이라는 것이다.
최남진 원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WGBI 편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비정부채 시장까지 적시는 진정한 낙수 효과가 되려면 발행 시장의 질서 확립이 먼저”라며 “비정기적 발행 물량은 투자자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시장의 소화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강조했다. 수급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세금·발행 구조를 손질해야 WGBI 호재가 실물경제의 온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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