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서도 문화의 씨앗은 자란다
■우윤근 전 주러시아 대사
경협 등 안갯속 한러 관계 위태롭지만
양국간 문화예술로 대화 시도 이어져
새 봄 준비하는 희망의 씨앗 틔워야
수정 2026-03-12 05:00
입력 2026-03-12 05:00
“인생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러시아의 대문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소설 ‘닥터 지바고’의 대미를 장식하며 읊었던 시구다. 우리의 삶처럼, 한 국가의 외교 역시 평탄한 들판만 이어질 수 없다. 때로는 높은 산을 만나고 때로는 거친 숲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가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반드시 찾아올 ‘부활의 봄’을 예찬했듯 지금의 한러 관계 역시 문화라는 뿌리 깊은 생명력으로 엄중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다.
주러시아 대사로 부임해 모스크바의 혹한을 마주했던 2017년 겨울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줬던 것은 차가운 공기를 뚫고 전해지던 양 국민의 정서적 교감이었다. 한러 정상회담과 러시아 월드컵이 동시에 열린 이듬해 6월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아르바트 거리,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에서 한국 응원단과 러시아 시민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카튜샤와 아리랑을 섞어 부르던 그날 밤, 나는 국가 간의 조약문보다 위대한 민초들의 우정을 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깊은 철학과 안톤 체호프의 치열한 인간 탐구,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애절한 선율에 오랜 세월 위로받은 한국인들처럼, 러시아의 젊은이들도 K팝의 역동성과 한국 영화, 드라마가 그려내는 섬세한 정서에 열광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갈파했다. 나는 그 ‘아름다움’의 실체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순수한 문화 예술적 교감이라고 믿는다.
이런 가운데 한러 관계는 전례 없는 험난한 시험대에 위태롭게 서 있다. 정치적 대화의 창구는 좁아졌고 경제 협력의 시계(視界)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일각에서는 양국 관계의 장기적 침체나 단절을 우려하는 비관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1990년 수교 이래 36년간 쌓아온 한러 관계의 토대는 일시적인 지정학적 풍랑에 난파될 만큼 허약하지 않다. 양 국민 간 서로의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친밀감이 단단한 암반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러시아에서는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전 주한대사 부자(父子) 등을 중심으로 ‘한러 문화 간 지속적인 대화’라는 뜻깊은 저서가 출간됐다. 필자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두 번째 임무를 수행 중인 이석배 현 대사, 박노벽 전 대사 등 주러 대사 4명이 각자의 경험과 제언을 담아 기고를 더했다. 정치로 얽힌 매듭을 문화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끈질긴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한러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끊임없이 만나고 소통해야만 한다. 정치가 닫힌 문 앞에서 고뇌할 때 문화는 그 문틈으로 스며들어 서로의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온기가 된다. 필자가 조정위원장으로 몸담고 있는 한러 대화 역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장 매서운 눈보라를 견뎌낸 나무만이 화려한 봄꽃을 피워낼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민간과 학계에서 이어지는 문화적 연대의 노력들이 동토(凍土)에 층층이 쌓여 언젠가 다가올 한러 관계의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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