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좋다” 한마디에 지구 반바퀴...전기톱 조각가 김윤신, 91세의 귀환
호암미술관서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3년 나무 찾아 아르헨티나행
“1000점 만들면 가자” 실현에 40년
디지털시대 현대인의 목마름 채워
베니스·구겐하임서 먼저 손내밀어
주요작 170개 집결…6월 28일까지
수정 2026-03-12 00:41
입력 2026-03-11 17:43
1983년 12월, 조각과 교수로 재직하던 대학의 방학이 시작되자 짐을 쌌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조카가 “이곳 나무가 아주 좋다”고 한 그 한마디에 홀린 듯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늘에서 처음 마주한 남미 대륙의 드넓은 땅과 산이 눈 앞에 펼쳐졌다. 벌목과 전쟁으로 숲이 사라진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다 실험해 보겠다. 작품을 1000점 정도 만들면 한국에 돌아가자.”
그날의 다짐 이후 작가는 40년 가까이 외국인 조각가로 아르헨티나 생활을 이어갔다. ‘전기톱을 든 여성 조각가’로 유명한 원로작가 김윤신(91)의 이야기다. 작가의 최대 규모 미술관 회고전 ‘합이합일 분이분일’이 이 17일부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 제목은 작가와 재료가 하나(合)되고, 작품이라는 또다른 하나가 탄생(分)한다는 김윤신의 예술철학에서 따 왔다.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이 한국 여성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망실된 1960년대 이전의 작품을 제외한 약 1500점 작품 중 시기별 주요작을 엄선한 170점이 2개층 미술관 전관을 채웠다.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작가는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1964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 입학해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했다. 한국의 조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을 시작으로 권진규 같은 구상조각과 김종영 계열의 추상조각으로 발전했고, 철조 조각의 용접미학이나 비(非)조각 등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김윤신은 수직 형태의 나무 조각으로 자신만의 예술을 구축했다. 1973년 이우환·권영우·김창열 등과 함께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이듬해 최초의 여성 조각가 단체인 ‘한국여류조각회’를 창단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작가가 주 재료인 나무를 찾겠다고 안정된 기반을 떨치고 떠난 것이다. 수십 년 잊힌 듯했던 작가는 2023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개인전으로 재조명됐다. BTS의 RM이 다녀가며 주목받았고, 그 전시를 인연으로 2024년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됐으며, 국제갤러리와 리만머핀갤러리의 전속작가로 러브콜을 받았다. 나무와 돌이라는 자연의 재료를 택한 그의 작업들은 디지털 시대 현대인의 목마름을 채우고, 환경 위기 속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의 회고전이 열리는 호암미술관 전시장 초입의 ‘기원쌓기’ 연작은 한옥에서 나온 목재를 마치 소원빌며 쌓은 돌탑같은 형상으로 다듬은 수직적 조각이다. 새벽이면 산으로 올라가 독립운동 나간 오빠의 안위를 빌며 기도하던 어머니 옆에서 어린 김윤신은 돌을 쌓곤 했다. 그의 작업에 한국적 감성이 짙게 깔린 배경이다. 오빠를 찾겠노라 시신들을 마구 뒤지던 5살 소녀의 용기가 있었기에, 훗날 타국 땅 노상에서 전기톱으로 나무와 돌을 다듬는 일에도 한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 나무가 부드러운 반면 아르헨티나 나무는 아주 단단하다. 그래서 전기톱을 들었다. 전기톱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작업도 마음대로 표현될 수 있다. 나중에 '색깔좋은 돌이 조각 재료가 될 것 같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한달음에 멕시코를 찾아 돌작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1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작가는 구순 백발이 무색할 만큼 힘찬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간 자주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의 초기 판화,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소장한 김윤신 작품도 처음으로 외부 전시에 나왔다. 오닉스, 백운석, 브라질 벽옥 등 세공하면 보석이 될 원석을 전기톱으로 매만진 돌 작업의 방, 조각가로서의 한 길을 보여주는 듯한 긴 좌대 위에 놓인 나무작업 연작들은 이번 회고전의 백미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리움미술관 수석큐레이터는 “현대적이면서 자연에 가깝고, 한국적이면서 이국적이며,지역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선 김윤신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유사한 예를 보기 어려운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전시는 6월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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