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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전쟁 이후 달라지는 세계 질서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中, 투자 다변화로 공급망 자립 강화

유럽, 美의존 줄이고 홀로서기 속도

韓도 ‘다층적 대응’ 생존전략 세워야

수정 2026-04-13 05:00

입력 2026-04-13 05:00

지면 29면

미국과 이란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마주 앉았다. 포성이 채 가시지 않은 협상 테이블이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초기 예상을 깨고 전쟁은 6주를 끌어왔다. 협상이 성공적인 종전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다만 종전 여부와 관계없이 이번 전쟁이 세계 질서에 남긴 상흔은 깊고 넓다.

첫째, 미국이 미중 전략 경쟁에서 이탈하는 양상이 표출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11월 국가안보전략서와 올해 1월 국방전략서를 통해 중국을 최우선 경쟁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으로 인도태평양에 집중하려던 전략은 상당 부분 삐걱거리게 됐다. 대규모 군사물자가 소진됐고 즉응 태세도 흔들렸다. 반면 중국은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인 사이 ‘전략적 평온기’를 십분 활용해 취약점을 메우고 국력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 새로운 5개년계획으로 대외 의존을 줄이고 산업기술을 고도화하며 공급망 자립도를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인공지능(AI) 경쟁에서도 미국이 생성형 AI에 집중하는 사이 로봇공학, 6세대(6G) 이동통신, 체화 AI 등으로 투자를 다변화하고 있다. 전쟁으로 재정 여력과 정치적 집중력이 분산된 미국, 그 틈을 중국이 파고들고 있다. 미중 경쟁의 무게 추가 조용히 기울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유럽의 ‘홀로서기’가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전쟁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향해 ‘겁쟁이’라는 거친 말을 쏟아내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미 전쟁 이전부터 미국 의존도를 낮추려던 유럽의 움직임은 이번을 계기로 더욱 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독일은 향후 4년간 약 7500억 달러를 국방에 쏟아붓겠다고 선언했고, 2029년 독일의 연간 국방비는 약 1890억 달러로 러시아 전시경제와 맞먹는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내부의 역할 분담도 구체화되고 있다. 독일은 재정과 방위산업, 폴란드는 전선 방어, 프랑스는 핵전력과 원정군, 영국은 해군력과 핵 억제를 맡는 구도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트럼프 아첨꾼’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도 결국 자립을 위한 시간 벌기로 읽힌다. 미국은 대서양 동맹을 잃을 수도 있다.

셋째, 세계 에너지 공급망이 뒤흔들리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이번 전쟁을 “역사상 글로벌 에너지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전쟁 발발 3주 만에 유가는 55% 폭등했고 세계 석유의 약 20%와 비료의 33%가 통과하는 호르무즈해협은 사실상 봉쇄됐다. 연료 배급제, 근무일 단축, 공장 가동 중단이 곳곳에서 뒤따랐다. 앞으로 각국은 에너지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생존의 무기로 다루게 될 것이다. 중국은 전략비축유 확대에 나서고 유럽은 재생에너지 전환을 서두르고 있으며 한국 역시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시장 논리로 돌아가던 에너지 공급망이 국가 간 생존경쟁의 전장으로 바뀌고 있다.

넷째, 중동 질서의 재편이다. 친미 성향의 걸프 왕정 국가들은 워싱턴과의 동맹 가치를 냉정하게 재검토하고 있다. 미국이 전쟁 초기 방공망을 이스라엘 방어에 우선 배치하면서 걸프 지역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미국은 이스라엘 안보를 걸프보다 먼저 챙긴다’는 불신이 굳어지는 모양새다.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시설 공격 당시 미국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았던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2025년 카타르 도하에서 활동하던 하마스 협상 대표단에 대한 이스라엘 타격을 미국이 끝내 제어하지 못한 사건도 이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걸프 국가들이 미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전략적 중간 지대’로 이동하는 흐름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한국의 처지도 한층 복잡해졌다. 안보 면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미중 경쟁, 동맹의 자립, 에너지 재편이라는 세 방향에서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한 축에만 기대는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금 세계는 규칙 기반 질서에서 힘과 이익 기반 질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 격변의 시대에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대응, 그것이 지금 한국에 요구되는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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