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신산업의 디딤돌로
김종문 한경대 석좌교수 /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입력 2026-04-15 18:27
기술은 있어도 적용할 법령이 없으면 사업은 할 수 없다. 무인 배달 로봇 사업을 하려면 안전과 인증 등 기준이 필요했다. 실외 이동로봇이 수년간의 진통 끝에 허용된 이유다. 규제 샌드박스 실증 과정에서 제시된 법령상의 많은 미비점을 채워야 했을 것이다.
실제 실외 이동로봇의 개념을 지능형로봇법에서 정의하고 운행 안전 인증 체계 및 보험 가입 의무를 도입했다. 안전 인증을 받은 로봇에 보행자 지위를 부여하는 규정도 생겼다. 배달과 순찰을 위해 공원에 출입하려면 공원관리법을 바꿔야 했다. 이동형 기기에 의한 영상 촬영 및 활용 근거 마련을 위해서는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정해야 했다. 신산업을 하려면 이처럼 예상했거나 예상 못 한 많은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 정부가 이를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잘해내는 것이 신산업을 돕는 길이다.
향후 10년간 규제 개혁의 최우선순위는 덩어리 규제의 완화가 아닌 신산업 육성에 맞춰져야 한다. 그것이 더 전략적이고 실용적이다. 수도권과 대기업·노동·안전 등에 걸친 큰 규제를 개혁하려면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규제 개혁을 위한 자원과 역량에는 제한이 있다. 희소한 자원을 논란과 갈등이 극심할 덩어리 규제에 쓰기보다는 인공지능(AI), 바이오, 모빌리티 같은 미래산업의 승리를 위해 투입하는 것이 낫다.
신산업은 불확정성, 기술·규제 속도 격차, 산업 간 융합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규제가 없으면 시장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진다. 규제를 통해 개발과 서비스 기준을 제시하고 유연한 적용을 통해 사업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정부도 그래서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8년째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관건은 있는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다.
정부는 첫째, 사전 규제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2011년 화장품법 개정은 K뷰티 성장의 결정적 계기였다. 사용 가능 원료를 열거하던 규제 방식을 금지 원료만 규정하는 방식으로 바꾸자 기업의 창의적 시도가 늘었고 혁신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이후 주목할 만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정부는 제2, 제3의 화장품법 사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네거티브 규제 전환을 지금보다 훨씬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둘째,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신기술이 시장에서 검증받을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2019년에서 2024년까지 샌드박스 사업 1684건이 승인됐지만 실제 사업으로 이어진 비율은 22%에 그친다. 승인 지연, 과도한 부대 조건, 실증 이후 법령 정비 지연 때문이다. 샌드박스는 희망 고문의 장치가 아니라 기업 도전의 발판이 돼야 한다.
셋째, 신산업과 기존 산업 간 이해충돌을 적극 조정해야 한다. 정부가 갈등을 외면하면 신산업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정부는 중재와 상생 기금 조성, 보상 체계 설계 등 안전망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더라도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데이터로 입증해야 한다. 자율 규제, 보안 기준 준수, 보험 가입, 사후 규제 강화 수용 등으로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또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해 기술 안전성과 효용성을 실증하고 국민에게 제공할 편익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결단할 명분은 결국 국민의 이익에서 나온다.
전통적 규제는 위반을 우려해 미리 통제하는 방식이 많았다. 신산업 규제는 민간의 시도를 우선하고 신뢰를 저버릴 경우 엄정하게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신산업부터 이런 규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네거티브 규제, 샌드박스 등 제도는 있다. 제대로 운영해 규제가 디딤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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