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누가 공공성을 지킬 것인가: 시민사회의 새로운 길
서순탁 경실련 공동대표(전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입력 2026-05-04 11:43
서순탁
경실련 공동대표
한국 시민운동은 지난 30여 년간 한국 민주주의의 한 축을 떠받쳐 왔다. 1987년 체제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보의 비대칭을 깨뜨리는 「감시자」였고, 흩어진 시민의 목소리를 모으는 「확성기」였으며, 권력과 자본을 견제하는 「공익의 파수꾼」이었다. 금융실명제 도입, 재벌 개혁, 부패방지법과 정보공개법 제정, 부동산 투기 근절, 임대차 제도 개선에 이르기까지—한국 사회의 굵직한 제도 변화 뒤에는 언제나 시민단체와 회원들의 헌신적인 참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가능하게 한 토대는 다름 아닌 시민운동의 운영 원칙 그 자체였다. 정부 재정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시민의 회비와 후원에 기대어 지켜온 독립성과 공익성—이것이야말로 시민단체가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이며, 그 자체로 우리 민주주의의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시민사회 앞에는 자긍심보다 더 무거운 질문이 놓여 있다. 「시민단체는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이 물음은 한 단체의 생존 차원을 넘어, 한국 시민운동 전체의 정체성과 역할을 다시 묻는 시대적 질문이다.
이 질문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20세기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생애 마지막 저작 『제네시스: 인공지능, 희망, 그리고 인간 정신(Genesis: Artificial Intelligence, Hope, and the Human Spirit)』(에릭 슈미트·크레이그 먼디 공저, 2024)에서 인공지능의 등장을 인쇄술과 계몽주의에 비견되는 「인간 조건의 근본적 재편」으로 규정했다. 그는 AI가 인간의 사고·판단·결정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는 시대에,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판단 권한을 기계에 양도하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기업·시민사회가 함께 「AI를 인간 가치에 정렬(alignment)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신저가 마지막까지 주목한 것은 결국 「누가 AI 시대의 공공성을 지킬 것인가」라는 물음이었으며, 이는 오늘 한국 시민사회가 마주한 질문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시민운동이 출발하던 1980~90년대의 환경은 이미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누구나 SNS로 발언하고, 국회·청와대 청원이 일상화되었으며, 1인 미디어가 거대 언론을 압도하기도 한다. 시민단체가 독점하던 「공익 의제 설정 권력」은 이미 분산되었고, 일각에서는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뼈아픈 비판마저 제기된다. 회원의 고령화, 청년층 참여 저조, 후원의 위축은 특정 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시민사회 전반이 함께 마주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시민단체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발언의 통로가 늘어난 만큼 목소리는 더 흩어지고, 데이터는 더 파편화되며, 정작 정책 형성과정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더욱 좁아졌기 때문이다. 청원 게시판에 모인 수십만 명의 동의는 정작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흩어지고, SNS의 분노는 다음 이슈에 묻혀 사라진다. 시민의 목소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정책으로 연결되는 비율은 오히려 낮아진 역설적 상황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정책은 점점 더 데이터 중심으로 복잡해지는데, 시민의 참여 방식은 여전히 청원·게시판·일회성 제보 수준에 머물러 있다. 키신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판단이 기계로 떠넘겨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길목에서, 정착 시민의 목소리는 정책 과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한국 시민사회에 던져진 가장 절박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응답의 한 단초가 최근 시민사회 내부에서 모색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실련이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AI 기반 시민참여 플랫폼」 구축 시도다. 시민이 주거·부동산, 소비자 보호, 청렴·공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기하는 의견과 제보를 상시적으로 수집·축적하고, 인공지능이 반복되는 문제와 구조적 이슈를 자동으로 식별하며, 회원과 연구진, 분야별 전문가가 이를 검증해 정책 의제와 입법 제안으로 발전시키는 새로운 공론 인프라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예컨대 수백 명의 시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호소하더라도, AI는 이를 하나의 공통된 문제 유형으로 묶어 피해 유형·지역·시기별로 정리할 수 있다. 흩어진 비명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정책 의제로 전환되며, 다시 시민의 삶으로 환류되는 구조다. 물론 이러한 구상이 실제 인프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체 내부의 치밀한 준비와 시민사회의 폭넓은 공감·연대가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시민단체의 생존은 더 이상 조직의 이름값이나 과거의 성과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시민이 자신의 문제가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경험을 할 때, 참여와 후원도 다시 살아난다. AI 시민참여 플랫폼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 자체가 시민단체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참여가 정책 성과로 이어지는 경로를 다시 설계함으로써 시민단체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이 시도의 본질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시도의 핵심은 「AI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AI는 시민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도구일 뿐이며, 최종적인 판단과 정책 설계는 시민과 회원, 그리고 전문가가 함께 결정한다. 기술이 시민운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이 기술을 도구로 삼는 모델이다. 키신저가 『제네시스』에서 거듭 강조했듯, AI 시대의 관건은 「기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결정할 권리와 책임을 지킬 것인가」에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AI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AI에 끌려가는 것」이다.
이런 모색은 시민단체의 역할을 세 가지 차원에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첫째, 「감시자」에서 「정책 생산 주체」로의 전환이다.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시민의 목소리를 정교한 정책 대안으로 다듬어 입법과 제도 개선으로 연결하는 적극적 역할이다. 둘째, 「대변자」에서 「매개자」로의 전환이다. 시민단체가 시민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통로를 설계하고 그 목소리가 정책에 닿도록 매개하는 역할이다. 셋째, 「운동」에서 「인프라」로의 전환이다. 일회성 캠페인과 성명서를 넘어, 시민참여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정책으로 환류되는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러한 전환은 경실련 한 단체의 과제가 아니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YMCA, 흥사단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같은 고민을 마주하고 있다. 일부는 디지털 캠페인 플랫폼을 실험하고 있고(참여연대의 「열려라 국회」, 빠띠 협동조합의 공론장 도구가 그 예다), 일부는 데이터 저널리즘과 결합한 감시 활동을 모색하고 있으며(뉴스타파의 탐사보도, 정보공개센터의 데이터 공개가 대표적이다), 또 일부는 청년 시민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으로 세대 단절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흥사단·YMCA·참여연대의 청년 아카데미가 그것이다).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모일 때 비로소 한국 시민사회는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갈 길은 험난하다. 데이터의 편향성을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 알고리즘의 결정 과정을 어떻게 투명하게 공개할 것인가, 디지털 격차로 배제되는 시민의 목소리는 어떻게 담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면 AI 시민참여 플랫폼은 또 하나의 「기술 만능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데이터 윤리와 프라이버시 보호 원칙,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의 확보, 오프라인 참여 채널과의 병행 운영이 핵심 설계 원칙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운동이 창립 이래 지켜온 원칙—정부 재정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후원에 기반하는 독립성—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는 일이다. 이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시민의 플랫폼」은 「누군가의 플랫폼」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AI 전환기는 단지 기술이 바뀌는 시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 자체가 재구성되는 시기다. 거대 플랫폼 기업이 데이터를 독점하고, 행정이 알고리즘 뒤로 숨고, 시민이 다시 객체로 밀려나는 미래는 결코 추상적인 우려가 아니다. 키신저가 『제네시스』의 마지막 장에서 남긴 경고처럼, AI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의 폭주」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시민사회가 「공익을 위한 AI」의 모델을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결국 자본과 권력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데이터로, 데이터를 정책으로, 정책을 다시 시민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새로운 공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한 단체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
「감시」를 넘어 「생산」으로, 「대변」을 넘어 「매개」로, 「운동」을 넘어 「인프라」로—이것이 한국 시민운동이 답해야 할 시대적 물음이다. 시민단체가 살아남는 길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것도, 기술의 흐름에 끌려가는 것도 아니다. 시민과 함께, 회원과 함께, 그리고 새로운 도구와 함께 민주주의의 다음 장(章)을 써 내려가는 일—그 출발선에 한국 시민사회가 지금 서 있다.
<용어 해설>
AI 시민참여 플랫폼
AI 시민참여 플랫폼」이란, 시민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피해·제안을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올리면, 인공지능이 비슷한 목소리들을 자동으로 모아 「어떤 문제가 어디서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를 정리해 주고, 전문가가 이를 검토해 실제 정책과 법으로 연결하는 디지털 공론의 장(場)을 말한다.
데이터 윤리와 프라이버시 보호 원칙
「데이터 윤리와 프라이버시 보호 원칙」이란, 시민이 플랫폼에 남긴 의견·제보·개인정보가 본인의 동의 없이 수집·활용·공개되지 않도록 하고, 데이터를 다루는 모든 과정에서 공정성·투명성·안전성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데이터의 편향성
「데이터의 편향성」이란, AI가 다루는 자료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분석 결과 또한 일부 집단의 목소리만을 대변하게 되는 문제를 말한다.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이란, 인공지능이 어떤 결론이나 판단을 내렸을 때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시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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