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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 ‘녹색 순수성’만 고집 말아야

황정환 김앤장 지속가능성 소셜ㆍ공시센터 센터장

ESG 투자, 자금 가야할 산업 배제돼

790조 기후금융, 자본에 정책신뢰 줘

이젠 ‘녹색 전환’ 검증 공시체계 세워야

수정 2026-05-07 05:00

입력 2026-05-07 05:00

지면 31면

최근 해외 언론에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반발로 자금이 빠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지속 가능 펀드는 약 840억 달러의 순유출을 기록했다. 하지만 자본의 흐름을 넓게 보면 ESG 투자의 후퇴라기보다 자본이 ESG를 바라보는 기준이 재편되는 과정에 가깝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에너지 전환 투자는 약 2조 300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자본이 여전히 기후·전환 관련 투자에 적극적으로 배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동안 ‘관리’와 ‘변화’를 혼동해 온 것은 아닐까.

ESG는 그동안 규제 대응 중심으로 리스크 관리의 언어로 작동해 왔다.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ESG는 자동차의 ‘성능 좋은 브레이크’에 가까웠다. 브레이크는 필수적이지만 목적지를 바꾸지는 못한다. ESG가 관리의 언어에 머무르는 한 구조적 전환은 일어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녹색금융의 한계도 분명해졌다. 투자 대상이 이미 친환경적인 자산에 한정되면서 투자자에게는 선택지 부족을, 친환경으로 단기 전환하기 어려운 기업에는 자금 접근의 제약을 불러왔다. 국내 연구는 2030년까지 한국의 전환금융 수요를 약 1000조 원으로 전망하지만 이 자금이 가야 할 산업은 배제되는 구조다. 결국 자본은 ‘그린 워싱’ 우려 속에서 전환 자금이 절실한 산업 앞에서 멈칫거렸다.

이런 맥락에서 올 2월 금융위원회가 790조 원 규모의 기후금융과 한국형 전환금융을 내놓은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민간 자본이 주저하던 ‘회색 지대’에 정책적 신뢰를 세우는 마중물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녹색’이 아니어도 신뢰할 수 있는 전환 계획과 단계적 성과를 전제로 자본이 배분될 수 있다. 이는 기업에는 전환의 시간을, 투자자에게는 성과 중심의 선택지를 넓혀 준다.

이제 자본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바로 ‘이 자본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그 변화는 일어났을 것인가’이다. 탄소 경쟁력이 곧 가격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자본은 ‘착한 기업’이 아닌 ‘입증된 전환’을 선택하고 있다. 기업은 ESG를 전략과 성과의 언어, 즉 엔진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 엔진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공시다. 현재의 공시 구조에서는 전환 계획과 투자 정보가 서로 다른 체계와 위치에 분절돼 있다. ‘무엇을 전환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경계선도 아직 모호하다. 기준이 모호하면 전환 워싱, 지나치게 엄격하면 투자 위축이 뒤따른다. 전환에 투입된 자금과 실제 탄소 감축 성과가 하나로 연결돼 보일 때 자본은 이 회색 지대에 들어올 수 있다.

금융정책이라는 한 축은 세워졌다. 다음 단계는 공시 체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초기에는 전환 투자 비중 같은 정량 지표부터 점진적으로 국내 지속 가능성 공시 기준과 연결해 가야 한다. 탄소 중립은 ‘녹색 순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전환 궤적의 문제다. “이것이 진짜 녹색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녹색이 될 수 있는 경로 위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로를 시장이 반복 검증할 공시가 필요하다. 구조적 전환은 설계를 통해 이뤄진다. 전환의 속도가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 그 속도를 증명하는 규칙의 출발점이 바로 공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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