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왜 분야가 아니라 공통 언어인가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난양공대 산업처장 겸 변환경제센터장)
변환경제 RIE2030 톺아보기 ⑪
입력 2026-05-11 14:51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
디지털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산업 하나를 떠올린다. IT 산업, 플랫폼 기업, 소프트웨어 기술. 그러나 싱가포르의 2030년 국가 전략인 RIE2030(Research, Innovation and Enterprise)에서 디지털은 그런 의미의 ‘분야’가 아니다. 이 문서에서 디지털은 제조, 헬스, 도시를 관통하는 공통 언어다.
이 차이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을 분야로 보면 투자와 정책은 특정 산업으로 몰린다. 반면 디지털을 공통 언어로 보면 질문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전환은 어디서든 작동하는가, 그리고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RIE2030이 디지털을 독립된 축으로 다루는 이유는, 디지털이 변환경제를 작동시키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원이 자산으로 전환되기 위해 필요한 측정, 축적, 이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은 모두 디지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전환의 전제 조건이다.
예를 들어 제조에서 공정 데이터를 생각해 보자. 공장 내부에 머무르는 데이터는 단순한 운영 정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표준화되어 공급망 기업들과 공유되고, 품질 기준과 연결되며, 금융기관의 리스크 평가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그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동일한 공정 데이터가 생산 효율을 넘어서 산업 신뢰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디지털이 언어로 작동할 때 비로소 다른 산업과 연결된다.
제조에서 디지털은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공정 데이터는 자산이 되고, 공정 표준은 경쟁력이 되며, 에너지 관리 데이터는 ESG 성과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사용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간에도 효율 차이가 명확해진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내부 관리가 아니라 투자 판단과 공급망 선택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헬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은 진단 기술을 넘어서 예방과 관리라는 시스템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개인 건강 데이터가 병원, 보험, 정책 시스템과 연결되면 치료 이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예방이 가능해진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은 병원에서 치료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활 데이터로 관리되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이 의료 기술을 넘어 헬스 시스템 전체를 연결하는 언어로 작동하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디지털이 정책의 감각을 숫자로 바꾼다. 직관 대신 데이터가 정책을 이끈다. 예를 들어 교통 혼잡 문제를 해결할 때, 단순히 도로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 데이터를 분석해 시간대별 요금 정책을 조정하거나 대중교통 이용을 유도할 수 있다. 정책 효과는 실시간으로 측정되고, 필요에 따라 즉시 수정된다. 디지털이 정책 실행의 피드백 루프를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공통적인 점은 하나다. 디지털이 없으면 전환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디지털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순간, 전환은 길을 잃는다.
RIE2030은 이 균형을 매우 정교하게 잡는다. 특정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어떤 전환을 만들고 싶은지를 먼저 정의하고,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조건을 설계한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지만 언어는 오래 남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디지털은 경제의 문법에 가깝다. 같은 데이터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같은 기술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자산 구조가 형성된다. 디지털이 공통 언어라는 말은 모든 도메인이 같은 문법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ESG 데이터를 보자. 동일한 탄소 배출 데이터라도 단순 보고에 머물면 의미가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금융기관의 투자 기준, 공급망의 거래 조건, 정부 정책 평가 지표로 동시에 활용되면 하나의 공통 언어가 된다. 기업, 정부, 금융이 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이 없다면 이 연결은 불가능하다.
이 접근은 디지털 전환 담론과도 다르다. 디지털 전환이 종종 기술 도입의 속도를 강조한다면, RIE2030은 디지털을 통해 무엇이 전환되었는지를 묻는다. 기술 도입 여부가 아니라 가치의 위치 변화가 기준이다.
한국의 상황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디지털 정책을 말할 때 산업 육성과 기술 경쟁력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디지털은 서로 다른 정책과 산업을 연결하는 언어로 작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분절된 분야로 남아 있는가.
예를 들어 공공 데이터와 민간 데이터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부처별로 분리되어 있다면, 데이터는 존재하지만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데이터 표준이 통합되고, 산업과 금융이 동일한 기준을 공유하면 디지털은 하나의 공통 문법이 된다.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연결 구조에서 발생한다.
RIE2030은 디지털을 통해 분야 간 경계를 허문다. 제조와 헬스, 도시와 ESG, 기술과 재정이 하나의 언어로 대화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언어의 이름이 바로 디지털이다.
다음 회에서는 이 디지털 언어가 ESG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ESG가 왜 비용에서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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