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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주의 건축과사람] 그 많은 규제는 어디서 왔을까

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오래된 건축법령, 다양한 취향 못담아

상당수 일제때 뿌리, 고인 물처럼 경직

낡은 규제론 비슷한 도시풍경 반복될 뿐

수정 2026-05-18 10:10

입력 2026-05-16 05:00

지면 23면

최근 한 공공주택지구의 필지를 분양받은 건축주의 설계 의뢰를 맡게 됐다. 계획 지침을 검토하다 보니 새삼 익숙한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의 경사는 얼마 내외로 하며 담장 설치는 지양하되 가급적 1.2m 이하의 자연 소재를 권장한다’ 등이다. 30여 년 전부터 경기 성남 분당, 고양 일산 등의 신도시 지구단위계획에서 익히 봐 온 규제의 내용이다.

마치 따뜻한 봄날에 미처 녹지 않고 산 정상에 남은 잔설처럼 오래전 누군가 만들었던 지침 혹은 규제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를 무시한 채 법령에 남아 있다. 원색이나 조잡한 여러 가지 재료 금지, 담장은 없으면 좋고 아주 낮게, 평지붕보다 경사진 지붕, 통일된 색채, 정돈된 가로수와 마당. 이처럼 당시에는 선진적이고 품격 있는 중산층 도시의 모습이라 믿었던 주택단지를 상상하며 만든 기준이 낡은 채 아직도 유령처럼 남아 서성이고 있다.

문제는 그런 규제나 법으로 인해 도시가 다양한 계층, 다른 세대와 취향을 담지 못하고 다양성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적 규범뿐만 아니라 생활 규범과 계층적 취향까지도 은연중에 법과 심의를 통해 제도화하고 이를 통해 ‘욕망의 표준화’가 발생했다. 그것은 거리의 풍경을 디자인하는 제도였고 더 나아가 생활양식 자체를 유도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도시를 걷다 보면 서로 닮은 지붕과 외벽, 비슷한 높이의 담장과 마당이 반복된다.

초기 신도시 계획가들은 마치 모든 건물이 조감도 속 풍경처럼 한순간 완성되리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규칙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어떤 집은 낡고 어떤 집은 증축되며 어떤 집은 카페로 변했다. 담장을 없애자 사생활 침해에 대한 불안감에 사람들은 높은 생울타리와 불투명 유리, CCTV로 새로운 경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계는 교묘해지고 사람들은 등을 돌린 높은 벽을 만들어 창을 작게 내고 안쪽에 마당을 만든 중정형 설계를 선호했다. 줄지은 벽들이 거리의 시선을 막아섰고 도시는 법이 의도한 방식과 다르게 흘러갔다.

한국의 도시를 걷다 보면 묘한 익숙함이 느껴진다. 비슷한 높이의 건물, 반복되는 아파트 단지, 엄격하게 나뉜 용도지역, 그리고 지나치게 세밀한 건축 규제. 우리는 그것을 흔히 ‘한국식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상당수는 일본 근대 도시법 체계와 연결된다. 용적률, 건폐율, 용도지역, 건축선, 사선제한, 지역·지구, 건축협정 등 오늘날 건축 실무 용어 대부분 또한 그렇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전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이 체계를 받아들였고 이후 압축 성장 시대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발전시켰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21세기에도 건축 분야의 한계는 여전하다.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기보다 검증된 기존 제도를 빌려 오는 게 편리하고 쉽기 때문이다. 행정 부서 자문을 해보면 앞으로 지어질 건축의 계획이 오타조차 수정되지 않는 예전 지침과 사례를 근거로 작성돼 올라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도시의 공공성, 일조와 보행, 안전과 환경은 공동의 규칙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고인 물처럼 경직돼 있다면 서로 다른 취향과 욕망, 세대와 시간이 충돌하며 형성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자유롭게 디자인된 도시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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