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나는 SOLO·이하 나솔)가 뭐길래. 평소 숨쉬기 운동조차 귀찮아하던 ‘나솔 덕후’를 무려 10km나 달리게 했다.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2026 나는 솔로런’(이하 나솔런) 현장은 기록을 다투는 러너들 대신 출연자의 가명을 배에 단 덕후들이 가득했다.
직장인 김모(32) 씨는 이날 배에 ‘옥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여의도 일대를 달렸다. 평소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는 그는 “내내 달려야 하는 마라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며 “심지어 첫 마라톤인데 5km도 아니고 10km라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이 엄청났다”고 털어놓았다.
“지금부턴 경찰과 도둑입니다”…낙오 위기 버티게 한 한마디
ENA·SBS Plus·촌장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약 6000명의 참가자가 저마다 ‘옥순·영숙·광수·영철’ 등 자신이 선택한 이름표를 달고 달리는 이색 레이스로 꾸며졌다. 이들은 아침 7시 30분부터 여의도 문화의마당을 출발해 서강대교 인근을 반환하는 총 10km 코스를 달렸다.
하지만 덕심만으로 극복하기엔 10km의 벽은 높았다. 마라톤 경험이 4회 있는 김 씨의 친구 ‘현숙’(이름표)은 출발과 동시에 멀어졌고, 홀로 남겨진 김 씨는 이내 낙오 위기에 처했다. 5km 지점을 통과할 때쯤엔 낙오자를 태우는 회수 버스가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버스에 타라는 안내를 받았지만, 여기서 타버리면 정말 ‘탈락’이라는 생각에 꿋꿋이 타지 않고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체력이 바닥난 순간 곳곳에 서 있던 페이스메이커의 재치 있는 한마디가 김 씨를 다시 뛰게 했다. “뛰세요! 나는 솔로런은 진작 끝났습니다. 이제부턴 ‘경찰과 도둑’입니다!” 실제로 옆에 경찰차가 따라오고 있던 터라 낙오 위기의 참가자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김 씨는 “낙오되는 경험조차 나솔 세계관의 에피소드처럼 느껴져 즐거웠다”며 웃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한 건 김 씨만이 아니었다. 이날 낙오자는 남성 50명, 여성 114명으로 총 164명이었다. 기록 경신보다 나솔 세계관에 목적을 둔 덕후들이 대거 참여한 대회인 만큼 어쩌면 예고된 풍경이기도 했다.
끝내 결승선을 통과한 김 씨. 그는 “결승선 근처에서 도로를 통제하던 경찰분이 ‘들어왔으면 1등!’이라고 외쳐주시고, 모르는 분들이 ‘화이팅’을 외쳐줄 땐 어른이 되어 오랜만에 받는 진심 어린 응원이라 뭉클했다”며 “비록 꼴찌였지만 포기하지 않은 스스로가 뿌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미모보다는 광기?…나솔 덕후가 해석한 ‘옥순’ 캐릭터
자타공인 ‘나솔 유니버스’의 열혈 팬인 김 씨는 본방송은 물론 ‘나는 SOLO, 그 후 사랑은 계속된다’(나솔사계), ‘지지고 볶는 여행’, ‘촌장주점’ 등 파생 콘텐츠를 모두 챙겨봤다. 지난해 12월에는 서울 광화문 KT WEST 1층에서 진행된 남규홍 PD 토크콘서트까지 찾아갔다.
그는 “하트시그널이나 환승연애 같은 프로그램은 어쩐지 작위적이고 꾸민 느낌이라 잘 안 보게 된다”며 “기존 연애 프로그램과는 다른 ‘나솔’만의 꾸미지 않는 솔직함, 날것 그대로의 리얼리즘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이번 마라톤 참가도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솔 세계관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일종의 성지순례였던 셈이다.
이날 김 씨가 선택한 이름은 ‘옥순’. 솔로나라에서 흔히 미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름이지만 ‘나솔 덕후’ 김 씨의 해석은 달랐다.
“제가 볼 때 옥순은 개성과 광기가 공존하는 독보적인 캐릭터예요. 첫 마라톤인 만큼 가장 인상 깊은 이름을 선택하고 싶어 옥순을 골랐죠. 사실 광수를 하고 싶었지만 남자 캐릭터라 참았어요.” 그러면서 그는 웃어 보였다.
2달 만에 뚝딱…반대 무릅쓰고 탄생시킨 ‘반쪽 하트 메달’의 정체성
이처럼 평소 달리지 않던 덕후들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기획 단계부터 치밀하게 설계된 과몰입 장치들이었다. 나솔런의 홍보 마케팅을 담당한 김솔희 ENA 콘텐츠 마케터는 “참가자가 여의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솔로나라에 입주했다’고 느끼게 만드는 동선이 핵심이었다”고 설명했다.
TF팀이 꾸려진 건 불과 대회 두 달 전인 지난 3월. 김 마케터는 합류 직후부터 나솔 세계관을 러닝 행사에 맞게 재해석하는 마케팅 기획·홍보 콘텐츠 제작을 맡았다. 단 60일 만에 SNS 이벤트 5개와 각종 영상 콘텐츠 등을 기획·제작했다. 마케터 3~4명이 나눠 맡아도 될 분량을 혼자 소화한 셈이었다. 그는 “마라톤을 직접 뛰어본 적도 없어 ‘무한도전런’ 같은 이색 마라톤 후기를 샅샅이 찾아봤다”며 “주변 러너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나솔런을 준비했다”고 털어놓았다.
세계관 구현을 위해 먼저 나솔을 대표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고독정식, 솔로나라, 자기소개. 굿즈도 이에 맞춰 준비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어 덕후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던 ‘나솔 장우산’과 ‘자기소개 카드’ 등을 준비했고 짜장라면으로 프로그램의 상징인 ‘고독정식’을 재현했다.
굿즈 후보에 10기 영수의 유행어 “손풍기 없어, 손풍기? 손풍기 안 가져왔어?”에서 착안한 손풍기도 있었지만 고장 우려 때문에 아쉽게 탈락했다. 고독정식도 처음엔 짜장면 밀키트를 집으로 사전 배송하는 파격적인 아이디어까지 검토됐다.
무엇보다 김 마케터가 굿즈 중 가장 애착을 갖는 건 ‘반쪽 하트 메달’이다. 남녀 메달을 합쳐야만 온전한 하트가 완성되는 독특한 형태다. 그래서인지 기획 초반 “완전한 하트 메달을 주자”는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회명에 ‘솔로’가 들어가는 만큼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 마케터는 “혼자일 땐 미완성이지만 남녀가 만나면 하나가 되는 반쪽 하트 메달은 이번 대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이템”이라며 “남녀에게 각각 다른 메달을 준 대회는 없었던 것 같아서 무조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의 뚝심은 적중했다. 나솔런이 끝나고 온라인상에는 “메달 디자인이 정말 예쁘다”는 참가자들의 후기가 줄을 이었다.
“고독정식을 피할 수 없다면 질주하라”…B급 감성으로 승부
행사의 성격을 한 줄로 정의한 슬로건 “고독정식을 피할 수 없다면 질주하라” 역시 김 마케터의 작품이다. B급 감성과 세계관 과몰입에 집중한 결과물이었다.
그는 “‘나솔’이라는 IP(지식재산권)와 러닝을 연결하는 절충점을 고민하다 나온 문구”라며 “출발선에서 다 같이 ‘질주하라!’를 외치며 뛰는 모습 자체가 거대한 ‘나는 솔로’ 에피소드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무대 프로그램도 세계관에 맞게 3부로 구성했다. 1부는 나솔 OST로 꾸민 ‘솔로나라 플레이리스트’, 2부는 나솔 MC 송해나·이이경과 역대 출연진이 참여한 라이브 토크쇼, 3부는 일반인 참가자들이 무대에 올라 짝을 찾는 ‘솔로나라 자기소개 타임’이었다.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자기소개 시간을 현실로 옮긴 3부에는 사전 지원자만 수백 명이 몰리며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비용 면에서도 세계관 중심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자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벤트를 열어 약 5000만원에 달하는 홍보 효과를 거뒀다. 인스타그램에서는 30여개의 매체가 관련 소식을 자발적으로 공유해 접수 첫날에만 무려 1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김 마케터는 “‘나솔’이라는 IP가 강력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프라인에서 체감한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실제 현장 분위기도 일반 마라톤과는 사뭇 달랐다. 나솔런은 서울동아마라톤·JTBC 마라톤 등 일반 마라톤과 달리 러너보다 나솔 덕후들 비중이 높았다. 현장 곳곳에선 “이번 주 나는 솔로 봤어?” 등의 말로 대화하는 사람이 많았고, 현장은 온통 나솔 이야기로 가득했다. 김 마케터는 나솔 덕후와 러너의 비율을 대략 7대 3 정도로 추정했다.
대회 종료 후 약 일주일이 지났다. 그가 스스로 매긴 이번 마라톤의 완성도는 10점 만점에 9점. 김 마케터는 “처음 맡은 대형 오프라인 행사라 부담도 컸지만, 참가자들이 ‘나는 오늘 솔로나라에 다녀왔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브랜드 경험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의 진심은 통했다. 행사 후 인스타그램 DM에는 “나솔런 덕분에 소중한 인연을 찾았다”는 실제 참가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 마케터는 “현장에서 용기를 내 연락처를 주고받은 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성과”라고 전했다.
성공적인 첫걸음을 뗀 만큼 2회 개최도 이뤄질까. 김 마케터는 “확정은 아니지만 내부적으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며 “다음 나솔런에는 이번에 아쉽게 하지 못한 ‘손풍기’와 ‘짜장면 밀키트 배송’을 반드시 굿즈로 실현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오늘의 연재
더 많은 연재오늘의 이슈
더 많은 이슈-
399개
-
302개
-
5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