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삶에 “그래도 살아보자”…공감의 언어로 인기몰이
■고전 ‘바냐 삼촌’ 3색 변주
무기력·공허함 드러낸 ‘바냐 삼촌’
경성 배경 ‘반야 아재’ 한국적 정서
원작의 힘·연기력으로 흥행 이끌어
입력 2026-05-17 17:44
안톤 체호프의 대표 희곡 ‘바냐 삼촌’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는 가운데 전 회차 매진을 기록하는 등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100년이 넘은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불안과 허무, 무기력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오늘날의 수많은 ‘바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작품은 LG아트센터 제작 연극 ‘바냐 삼촌’이다. 이달 7일 개막한 이 작품은 배우 이서진과 고아성의 첫 연극 도전작으로 화제를 모았고, 개막 전 2만여 석 판매를 기록하며 흥행성을 입증했다. LG아트센터 측은 “전체 객석의 약 80%가 판매됐고 관객들의 호응도가 높다”고 전했다. 공연은 이달 말까지 이어진다.
오는 22일에는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대관 일정 등의 이유로 총 9회 공연을 예정하고 있는데, 개막 전에 모든 회차가 매진됐다. LG아트센터 서울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모두 1200석이 넘는 대극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흥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다음 달 20일에는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낭독극 ‘바냐 아저씨’까지 예정돼 있어 연극계의 ‘바냐 열풍’을 실감케 한다.
흥행에는 스타 배우들의 힘도 컸다. ‘바냐 삼촌’에는 이서진과 고아성을 비롯해 양종욱, 이화정 등이 출연한다. 예능과 드라마에서 활약해온 이서진은 삶에 지친 냉소적인 인물인 바냐를 생활감 있는 연기로 풀어내며 호평을 받고 있다. ‘반야 아재’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해온 배우 심은경이 첫 연극 무대에 도전한다. 조성하, 손숙, 남명렬, 기주봉 등 연기파 배우들도 대거 합류했다.
공연마다 서로 다른 개성과 동시대적 해석을 보여준 점도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은 19세기 러시아라는 원작 배경을 유지하면서도 대사를 현대적으로 다듬고 세련되면서도 어두운 색감의 무대를 활용해 인물들의 공허함과 무기력을 드러냈다.
반면 조광화 연출의 ‘반야 아재’는 배경을 근대 개화기 경성으로 옮겨 보다 적극적인 변주를 시도했다. 바냐는 ‘박이보’, 소냐는 ‘서은희’로 이름을 바꿨고, 조선의 전통과 서구 근대 문화가 뒤섞인 시대상을 통해 혼란과 인간의 불안을 한국적 정서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바냐 열풍’의 가장 큰 이유는 원작이 가진 메시지의 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극 중 바냐는 죽은 여동생의 남편인 교수의 성공을 위해 어머니, 조카 소냐와 함께 헌신적으로 영지를 관리했다. 하지만 교수가 젊고 아름다운 새 아내 엘레나와 영지에 온 이후 자신의 삶이 무의미했다는 허탈감에 빠진다.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 인물들의 후회와 좌절,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가 바냐에게 건네는 “그래도 살아보자”는 위로는 오늘날 관객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손상규 연출은 “이 작품은 잃어버린 세월과 이루지 못한 꿈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고 ‘이대로도 괜찮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계 관계자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이 바냐라는 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다”며 “불완전함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시대에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고 평가했다.
한편 다음 달 20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낭독극 ‘바냐 아저씨’는 젊은 창작단체 ‘공놀이클럽’이 제작한다. 무대와 소품을 최소화한 대신 배우들의 대사와 감정 전달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제작진은 “젊은 관객들도 체호프 고전의 철학을 보다 경쾌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번역과 각색에 공을 들였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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