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저력은 한국적이라서?…가장 인간적이라 통했다”
■ ‘亞·太 다양성의 대모’ 미셸 스기하라 CAPE 대표
亞·흑인계 서사 외면한 할리우드
연간 300억 달러의 잠재수익 놓쳐
보편적 스토리텔링이 수익성 좌우
성난 사람들·케데헌 등 K콘텐츠
다양한 인간의 감정 섬세히 다뤄
입양·이민 등 실제 경험에 공감도
한국 IP·포맷 경쟁력 충분하지만
엔터테인먼트의 근본은 비즈니스
인재 키워 의사결정권자 배출해야
“K콘텐츠가 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단지 ‘한국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건드렸기에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K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사랑받고 있는 현상을 두고 ‘할리우드 엔터업계 거물’인 미셸 K 스기하라 CAPE(아시아·태평양 엔터테인먼트 연합) 사무총장 겸 대표가 이렇게 분석했다. CAPE는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출신 창작자들과 그들의 리더십 육성을 지원하기 위해 탄생한 비영리기구로 올해 설립 35주년을 맞았다. 이 조직을 이끌며 아시아·태평양 지역 창작자들을 위한 ‘성공 사다리’ 역할을 해 온 스기하라 대표는 한국 서사의 강점은 한국성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보편적 인간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이달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리는 ‘서울포럼 2026’ 특별행사 ‘픽셀앤페인트’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스기하라 대표는 전 지구적 공명을 일으키는 K콘텐츠의 저력에 대해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와의 대담을 앞두고 17일 서울경제신문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인종·성별·종교 등에 의해 차별당하지 않는 ‘다양성(Diversity)’의 문제를 윤리적 덕목이 아닌 ‘비즈니스 필수 요건’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의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할리우드는 흑인·라틴계·아시아계 서사를 배제함으로써 연간 약 300억 달러(약 45조 원)의 잠재 수익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할리우드가 수익의 기회를 놓친 것은 흑인 콘텐츠 배제로 인한 100억 달러를 비롯해 라틴계 120억~180억 달러, 아시아·태평양계 20억~44억 달러의 규모로 추산됐다.
다양성이 수익성을 좌우하는 이유는 바로 소비자의 힘 때문이다. 스기하라 대표는 “오늘날 관객은 영리하고 거침없다”면서 “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잘못된 묘사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발(backlash)하고 그 결과는 가혹하다”고 짚었다. TV 중심의 시대에서 스트리밍 서비스인 유튜브와 소셜미디어가 ‘시청자 쟁탈전’을 벌이는 플랫폼 시대로 변화했지만 “관객은 어디에서든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찾아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가 한국 서사의 보편성을 입증한 최근 사례로 꼽은 작품은 두 편. 하나는 스티븐 연 주연의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이다. 스기하라 대표는 “보복 운전, 복수, 우울증, 화해 등 ‘성난 사람들’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으나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뤘다”면서 “연의 캐릭터는 복잡 미묘했고, 그의 ‘한국계’라는 정체성이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지난해 6월 공개 이후 연말까지 누적 시청 5억 회를 돌파해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본 오리지널이 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다. 그는 “수치심, 비밀, 우정, 자기 수용 같은 인간 감정을 다룬 작품이 K팝이라는 가장 한국적인 외피와 만나 세계 최대 히트작이 됐다”고 분석했다.
스기하라 대표는 “CAPE라는 조직을 통해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어디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아직 거론되지 않은 아시아계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CAPE가 5년 전 선보인 ‘줄리아 고우 단편영화 챌린지’는 골든글로브 수상자이자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장을 지낸 재닛 양 프로듀서가 자선사업가 줄리아 고우와 손잡고 만든 프로그램이다.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애넌버그 연구에 따르면 미국 영화 감독 중 단 0.2%만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출신 여성이다. ‘줄리아 고우 단편영화 챌린지’는 매년 여성 영화 제작자 4명에게 각 2만 5000달러 제작 지원금을 제공하고 최종 후보 8~12명에게는 업계 네트워킹 기회를 준다. 이 프로그램 출신의 작품이 칸·안시·선댄스 등 주요 영화제에 진출했고 일부 단편은 오스카 예비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백악관 상영작도 탄생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스기하라 대표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한 한국계 서사에 대해 “입양아 경험과 노화·돌봄(영화 ‘TAKE ME HOME’), 이민자·디아스포라·성소수자 정체성(영화 ‘SILENT VOICES’), 슬픔·정신건강·자살(영화 ‘YOU LEFT ME A GHOST’) 등 다층적”이라며 “한국의 이야기는 제한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가능한데 미묘한 실제 삶의 경험을 보여줄 수 있어야 진정한 공감을 얻는다”고 짚었다.
K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힘”이라고 재차 강조한 스기하라 대표는 내년 이후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자본의 흐름이다. 넷플릭스는 2023년부터 2026년까지 4년간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에 25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2016년 처음 한국 진출을 선언했을 당시 투자 규모의 두 배에 달한다. 넷플릭스 비영어 오리지널 TV의 한국 작품은 20%를 차지하며 전 세계 구독자 3억 명 중 60% 이상이 한 편 이상의 한국 작품을 시청했다. 스기하라 대표는 “2027년 이후 넷플릭스의 한국 투자가 어떤 모습일지 주목해야 하고 K콘텐츠가 비용 효율성을 유지하고 경쟁 심화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할리우드의 필수 파트너’로서 입지가 견고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국제 무대에서 K콘텐츠가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인재를 키워 결정권을 갖는 자리에 진출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기하라 대표는 ‘CAPE 리더스 펠로십’을 사례로 들어 “아시아의 목소리가 보편적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려면 콘텐츠에 대한 ‘그린라이트(Green Light·제작 결정)’ 권한을 쥔 크리에이티브 임원들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전략을 이미 10년 전부터 전개하고 있다”면서 “매니저·디렉터급 중견 임원이 부사장(VP) 이상으로 진출하도록 돕는 이 프로그램 출신들이 넷플릭스·아마존MGM스튜디오·NBC유니버설·월트디즈니·마블·훌루·파라마운트·라이온스게이트·A24 등에서 40차례 이상 승진했다”고 말했다.
K콘텐츠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론을 펴면서도 엔터테인먼트의 근본이 비즈니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스기하라 대표는 “생성형 AI는 빠르게 진화하고 마이크로드라마·버티컬 형식이 미국 시장에 침투하며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대격변’ 시대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엔터테인먼트의 근본은 ‘비즈니스’라는 사실”이라면서 “한국 지적재산권(IP)과 포맷은 ‘굿닥터’ ‘복면가왕’ 등을 통해 이미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만큼 앞으로도 특별한 스토리텔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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