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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바꾸는 통화정책 셈법…4개 중앙은행 “물가·성장 동시 변수”

입력 2026-06-02 06:00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2026 BOK 국제 콘퍼런스’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2026 BOK 국제 콘퍼런스’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공지능(AI) 투자 붐이 글로벌 통화정책의 새 변수로 떠올랐다. AI가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여 물가를 낮출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설비 투자를 자극해 물가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에너지 가격 충격과 공급망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주요 중앙은행들도 AI가 물가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통화정책 판단에 반영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이 같은 논의는 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2026 BOK 국제콘퍼런스’ 정책 대담에서 나왔다. 이날 대담에는 한국은행과 유럽중앙은행(ECB),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일본은행(BOJ) 인사들이 참석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이자벨 슈나벨 ECB 집행이사,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 고에다 준코 일본은행 정책위원에게 에너지 가격 충격과 AI 투자 붐이 각국의 물가와 성장, 통화정책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차례로 물었다.

신 총재는 “한국은 에너지 가격 충격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유로지역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중동 지역 원유 수입 비중도 커 유가 상승이 헤드라인 인플레이션과 생활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신 총재는 한국의 성장 흐름은 유로지역과 다르다고 봤다. 반도체와 수출 호조가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을 크게 상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했고, 교역조건 효과를 반영하는 국내총소득(GDI)은 12.3% 늘었다.

통상 유가가 오르면 교역조건이 악화돼 GDI 증가율이 GDP 증가율보다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도체 수출 호조가 에너지 가격 상승의 부정적 효과를 상쇄했다는 게 신 총재의 판단이다. 강한 반도체 경기와 수출 호조는 향후 명목 GDP 증가에도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명목 GDP가 늘면 가계부채와 공공부채 비율의 분모가 확대돼 관련 지표 개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신 총재는 이 같은 여건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통화정책 운용의 부담을 낮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통화정책 조정에 있어 장애물이 적다고 언급하며, 성장세가 강하고 산출갭이 향후 플러스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정책적 딜레마가 줄어든다고 봤다. 주택가격, 가계부채, 환율 등 주요 지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통화정책을 보다 효과적으로 운용할 여지가 커졌다는 설명이다.

신 총재의 이날 발언은 지난달 28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물가와 성장, 환율, 부동산 등 주요 지표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밝힌 것과 같은 흐름이다. 성장세가 견조한 만큼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통화정책 조정 여지가 크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셈이다.

이날 대담에서 각국 중앙은행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변수는 AI였다. AI는 기존에는 생산성을 끌어올려 공급 능력을 높이고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막대한 설비투자와 전력 수요를 일으키는 수요 충격으로 먼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다.

슈나벨 이사는 AI 붐이 당초 기대처럼 긍정적 공급 충격이라기보다 현재로서는 강한 글로벌 수요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데이터센터 건설과 첨단 반도체, 전력망, 냉각장비, 네트워크 장비 수요가 동시에 늘면서 중간재와 원자재, 전력 비용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화정책의 전통적 판단을 복잡하게 만든다. AI가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지면 중앙은행은 더 높은 성장률과 낮은 물가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AI 투자 붐이 단기 수요를 과열시키고 전력·장비·원자재 가격을 밀어 올리면 중앙은행은 성장 호조 속에서도 물가 압력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은 이 같은 흐름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국가다. 한은 워싱턴주재원이 정리한 연준 및 지역 연은 분석에 따르면 2025년 1~3분기 미국 실질 GDP 성장률 2.51% 가운데 AI 관련 투자의 기여도는 0.97%포인트로 추산됐다. AI 투자가 미국 성장의 39%를 견인한 셈이다. 빅테크의 고성능 칩 주문, AI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개발(R&D), 데이터센터 건설이 미국 성장세를 떠받쳤다는 평가다.

카시카리 총재도 미국 경제가 AI 관련 대규모 투자와 견조한 노동시장, 강한 기업이익에 힘입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에너지 순수출국이라는 점에서 유럽이나 한국, 일본보다 유가 충격을 일부 흡수할 수 있다. 다만 공급망 차질이 장기화하면 인플레이션 영향도 오래갈 수 있다고 봤다.

유로지역은 사정이 다르다. 에너지 순수입 지역인 만큼 유가 충격의 부담이 크다. 슈나벨 이사는 에너지 가격 충격이 더 이상 일시적 요인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판매가격 기대와 중장기 기대인플레이션으로 번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동시에 유로지역은 성장 둔화 우려도 있어 물가 대응과 경기 부담 사이의 딜레마가 크다.

일본도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아 유가 상승을 부정적 공급 충격으로 보고 있다. 고에다 정책위원은 유가 상승과 공급 충격이 물가와 산출에 어느 정도의 크기와 속도로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IT 관련 제품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중동 상황이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도 주요 변수로 거론했다.

중국발 상품 가격 하락 효과가 약해지고 있다는 점도 중앙은행들의 물가 판단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그동안 중국 등으로부터의 수입가격 하락은 상품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흐름이 멈추면 서비스 물가가 충분히 둔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품 물가까지 다시 오를 수 있다. 이는 근원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하는 경로가 된다.

결국 AI는 통화정책의 미래를 바꾸는 양면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성장률을 높이는 동시에 단기 물가 압력을 키울 수 있고, 생산성을 높이는 장기 효과와 투자 수요를 자극하는 단기 효과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AI를 단순한 성장 기술이나 디스인플레이션 요인으로만 볼 수 없게 됐다.

한국은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AI 반도체 수요는 수출과 성장률을 떠받치는 핵심 동력이지만 전력설비와 장비, 원자재 가격 상승을 통해 물가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성장세가 견조한 가운데 유가와 중간재 가격, 기대인플레이션이 다시 상승할 경우 한은이 금리 인하보다 물가 안정에 더 무게를 둘 가능성이 커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편 토비아스 아드리안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자문관 겸 통화자본시장국장은 별도 발표에서 금융여건 완화가 단기적으로 경기를 떠받칠 수 있지만 레버리지 확대와 경기 하방 위험을 키울 수 있는 만큼 중앙은행이 물가와 산출갭뿐 아니라 금융취약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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