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명품의 전통과 혁식 DNA

[BRAND STORY] 루이비통

"우리가 모르는 역사를 제외하고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말이다. 현대 문명이 쉴새 없이 쏟아내는 수많은 창조물은 결국 과거를 변형시켜 탄생한 결과이기에, 완벽한 새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과거의 창조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창조의 시작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올해로 설립된 지 157년째를 맞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은 그 시작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정운섭 기자 sup@hk.co.kr

중국 베이징의 중심지 천안문 광장 동쪽에는 중국이 자랑 하는 세계 최대 규모(20만㎡) 박물관인 중국국가박 물관이 있다. 층마다 선사시대부터 조상들에 의해 창 조된 유구한 역사를 시대별로 고이 담고 있다. 그런데 이곳 2층에는 놀랍게도 루이비통 전시실이 있다. 그 것도 총 8개에 달하는 2층 전시실의 절반인 4개를 차지하고 있다. 동양 문 화 발원지로서 중국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국가박물관에 어떻게 명품 브 랜드 전시관이 자리잡은 걸까.

국가박물관 측은 말한다. "역사성과 예술성을 갖췄는가를 엄정하게 판단 해 루이비통의 전시실 대관을 결정했습니다. 저희 박물관은 이번 전시회가 중국 문화계에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185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탄생한 이래, 157년 동안 수많은 혁신을 거듭 하며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성장한 루이비통이 예술적 풍토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중국 땅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창업주 루이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의 프랑쉬 콩테에서 태어났 다. 어린 시절 가구 장인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일찌감치 수공 예에 소질을 나타냈다. 14세가 되던 해엔 태어난 마을을 떠나 400㎞를 걸어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운 좋게도 당시 유명한 포장용 상자 제 조사였던 마들레인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837년 파리 생 제르멩 선로 개통식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다. 역마차 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철도개통으로 사람들이 더 빨리 더 멀 리 갈 수 있게 되자, 그는 앞으로 여행의 시대가 찾아올 것을 직감했고, 이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일어난 급격한 사회변동은 계 층의 간극을 크게 벌렸다. 한 세기 동안 빠르게 부를 축적한 상류층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 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명의 이기를 사용 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일년 뒤 유 럽 증기 기관선이 대서양을 건너 뉴욕을 왕복하 게 됐다. 장거리 여행은 유럽인들의 생활 속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루이비통은 이런 추세 를 정확히 예측하고 맞춤형 여행 가방과 액세서 리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157년 전통의 명 품 루이비통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솜씨 좋은 가방 장인으로 차츰 명성을 쌓아 가던 루이비통은 32살이 되던 해, 당시 여왕이 었던 유제니의 여행 짐을 싸는 임무를 부여받 았다. 그리고 이 일은 그의 이름이 유럽 전역으 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왕족 은 사회 전반의 유행을 선도하는 트렌드세터였다. 일반 대중은 여왕의 마 차에 가득 실린 루이비통 여행 가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패션잡지의 한 에디터는 말한다. "유럽에서 왕족은 특별한 계층입 니다. 나라별로 위상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 국민으로부터 주목 받 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트렌드세터예요. 그들이 입는 옷이 나 먹는 음식은 모든 연령층이 선망하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어요. 얼마 전 영국 윌리엄 왕자와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식 덕분에 영국의 웨딩 산업 매출이 급증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루이비통은 그런 소비 자 기호를 정확하게 읽어냈다고 할 수 있지요."

이후 일류 호텔과 그 당시 프랑스 패션의 중심지 오뜨 꾸뛰르 상점가 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루이비통은 첫 번째 부티크를 오픈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류를 읽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 덕분에 단숨 에 유럽 정상급 가방 장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무기 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단기간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는 혁신이었다. 그것 은 "성공의 정점에서 뒤를 돌아보라" 고 역설한 에드워드 잰더 모토로라 전 회장의 경영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노력이었다.

루이비통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여행 트렁크를 개발하기 위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해나갔다. 나무로 짜인 기본 틀 위에 가죽이 아 닌, 강하면서도 완벽한 방수 기능까지 갖춘 캔버스를 덧대어 트렁크를 만든 것. 요즘이야 방수처리된 가죽을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 가죽 은 방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게다가 캔버스 트렁크는 방수 기능 외에 도 화려한 디자인을 하는 데 더 용이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비통은 1858년 또 한 번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쇠로 띠를 두른 직사각형 모양의 트렁크를 선보였는데, 포플러 나무를 이용해 만든 이 가방은 완벽한 방수 처리를 위해 트리아농의 우수한 쥐색 캔버스 로 접착되었다. 당시의 트렁크는 뚜껑이 전부 아치형이어서, 여러 개의 트 렁크를 서로 겹쳐 쌓는 게 어려웠다. 기존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난 루이비 통의 신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비통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까지 세력을 넓혔다. 1870년엔 워드로브 케이스, 1875년엔 워드로브 트렁크를 출시해 유럽과 신대륙의 소비자들을 열광시켰다. 다양한 구두를 서랍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특 별한 슈 케이스도 선보였는데, 정교하게 내부가 패딩 처리된 칸막이가 소 비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기도 했다.

내놓는 상품마다 빅히트를 쳤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불거졌 다. 루이비통 제품을 모방한 짝퉁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비통은 그때에도 모조품을 만드는 이들을 발본색원하는 것보단 제품 혁신에 더 욱 박차를 가하는 쪽을 선택했다. 모조품이 따라올 수 없는 창의적인 제 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었다.

루이비통의 아들 조르주는 모조품 방지를 위해 1896년 기존 제품의 기하학적 패턴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프린트를 캔버스에 입히기 시작 했다. 먼저 그는 당시 유행하던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아 원을 두른 네 개 의 꽃잎과 마름모로 감싼 뾰족한 별을 고안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경 의의 표시로 LV 문양을 제품 디자인에 번갈아 교차시켰다. 오늘날 명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루이비통만의 특징적인 로고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탄생된 '모노그램 캔버스'는 1905년 브랜드 등록 절차를 마치고 곧 세계적인 상표로 성장했다. 그리고 오늘날 루이비 통을 상징하는 독보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루이비통은 여행 가방의 영역을 넘어 일상 생활에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제품을 개발했다. '키폴 Keepall' 의 탄생이었다. 1959년 끌로드 루 이비통 대에 이르러서는 리넨과 면을 부드러운 소재로 코팅하는 기술을 내놓았다. 기호학자이자 평론가인 롤랑 바르트가 묘사한 '플라스틱 혁명' 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후 루이비통의 가방은 다양한 형태와 사이즈, 기능을 아우르며 만들어졌다. 이국적이면서도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모노그램 캔버스는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건 루이비통이 지닌 가치를 발산해냈다.

그 사이 루이비통의 전통 트렁크들은 차츰 수집가의 애호 수집품이 돼 가고 있었다. 루이비통의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고 있었다. 명품브랜드 업 체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무겁고 부피가 큰 트렁크에서 드는 가방의 영 역으로 제품이 확대되면서, 비로소 여성과 가방의 밀접한 관계가 생겨났 습니다. 과거 트렁크가 디자인과 특별한 기능에 주목했다면, 여성이 선호 하는 가방은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액세서리와 비슷한 상징성을 지니게 된 거죠. 가방은 여성이 지닌 기품과 우아함, 나아가서는 자신이 속한 계 층까지 상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모노그램 캔버스를 갖기 위해 여성들이 저금을 할 정도가 됐다. 1997년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아트 디렉터로 합 류한 이후 루이비통은 의류, 신발류, 주얼리 컬렉션과 같은 전반적인 패 션 분야로 영역을 넓혀갔다.

루이비통은 유통망 범위를 세계로 넓혀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외 형적 성장은 자연히 따라오는 과실이었다. 1987년 모엣 헤네시와의 합병 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루이비통의 가치를 극대화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세계 최고급 샴페인과 브랜디 제조업체 모엣 헤네시와 루이비통 의 합병은 거대한 시너지 효과와 함께 명품 그룹 LVMH로 탄생시켰다. 그리고 LVMH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과 '지방시', '겔랑' 등을 소유하는 세계 최대 명품 그룹이 되었다.

한국에는 1991년 신라호텔에 최초로 매장을 오픈한 후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99년에는 국내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신발 컬렉션을 론칭했고, 2000년 9월에는 서울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면서 의류 컬렉션을 한국시장에 처음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에는 서울 8개 매장을 포함해 총 21개의 루이비통 매장이 전국에 분포해 있다.

루이비통은 국내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답게 매출액도 국내 최고다. 지난해 루이비통 코리아는 매출 4,273억 원과 영업이익 523 억 원을 달성했다. 각각 전년 대비 14.8%, 25.1% 증가한 액수다. 최근 5년 동안 이룬 성장률도 눈부시다. 5년 새 3배 가까이 늘었다. 1,212억원이었 던 2006년 매출은 지난해 4,273억 원으로 불어났다. 영업이익률도 지난 5 년 동안 2006년 79.6%, 2007년 113.5%, 2008년 28.3%, 2009년 35.1%, 2010년 25.1% 를 기록하며 가파르게 올랐다.

럭셔리 브랜드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욕구가 높아졌다는 점도 있지 만, 루이비통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제품 포트폴리오의 힘도 적절하게 작 용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국내 백화점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루이비통은 폭넓은 제품군과 가격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낮 은 가격대의 제품을 부담 없이 접하기 시작한 소비자들이 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드로 차츰 구매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정 타깃층을 거느 린 다른 명품 브랜드보다 더 확실한 추종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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