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형 항공기 보잉 787의 객실 유리창은 747기와 같은 기존 비행기에 비해 꽤 큰 편이다.
동체가 고강도의 탄소섬유로 만들어져서 창을 넓게 만들어도 안전에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강철보다 10배 강하지만 무게는 5분의 1에 불과한 신소재 탄소섬유를 놓고 태광산업, 효성 등 국내 기업들과 글로벌 기업들 간의 기술 선점 경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탄소섬유가 바꿔 놓을 소재산업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홍성민 기자 sungh@hmgp.co.kr
19세기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품 하나가 21세기 화학 업계의 화두를 장식하고 있다. 미래 기술을 논하는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 등장해도 손색이 없다. 바로 탄소섬유 얘기다. 탄소섬유는 에디슨의 다른 발명품처럼 우연한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 면화와 대나무를 태우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변화무쌍한 원소인 탄소(C)는 그 자체로는 육각형의 대단히 안정적인 형태를 띠지만,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석탄이 되기도 하고, 연필심이나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한다. 고분자 섬유인 아크릴Acryl 을 태워 탄소와 결합시키고, 이것을 다시 레진Resin이라고 불리는 합성섬유로 굳히는 과정을 거치면 강철보다 10배나 단단한 실인 탄소섬유가 만들어진다.
탄소섬유는 강한 강도 외에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무게는 철의 5분의 1인 플라스틱 수준에 불과하고 내화성도 매우 강해 향후 철의 강력한 대체제로 주목 받고 있다. 한국 탄소학회장을 맡고 있는 김명수 명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향후 10년 안에 자동차 부품 분야에서 철이나 비철금속을 상당 부분 대체할 것으로 본다"며 "철을 100% 대체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자동차의 무게가 기존의 5분의 1로 줄어들어 엄청난 연비 개선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BMW는 올해 상반기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CFRP: 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을 사용해 차체 중량을 기존보다 250~300kg 줄인 도심형 EV(전기자동차) 'i3'를 출시할 계획이다. 이 전기차는 한번 충전하면 130~160km를 운행할 수 있다. 기존 EV의 주행 거리가 평균 90km 안팎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전한 셈이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최첨단 항공기인 보잉787의 동체, 주 날개, 꼬리 날개에는 이미 탄소섬유가 기존의 알루미늄을 대체하여 사용되고 있다. 알루미늄보다 가볍고 강도가 높아서 기존 747기보다 객실 유리창을 크게 뚫어도 안전에 문제가 없다. 내구성도 훨씬 좋아 유지 관리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현재 787기 제작에 사용되는 부품 중 탄소섬유의 사용 비율은 50%가량 된다.
향후 이 비율은 꾸준히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탄소섬유의 수요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숨겨진 분야는 풍력발전 부문이다. 활용되는 곳은 바로 풍차의 날개. 풍력발전기기는 날개 1기당 수십 미터의 거대한 설비가 필요해 설치와 제조가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경량이면서도 고강도인 탄소섬유가 활용될 경우 설치 용이성과 발전 효율이 획기적으로 올라간다. 시장 전망은 매우 밝다. 원자력발전소 폐지 추세에 따른 대체수요 때문이다. 독일은 2022년까지 원전의 완전 폐지를 목표로 대체 에너지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일본 또한 동일본대지진으로 원전 가동을 중단한 이후 신재생에너지를 고정 가격에 매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세계풍력회의(GWEC)는 풍력발전 시장이 2016년에 2011년 대비 2배 이상인 500기가와트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탄소섬유 관련 산업이 블루오션으로 주목 받는 이유 중 하나다.
2010년 말 현재 세계 탄소섬유 시장규모는 약 2조 9,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그중 70%는 도레이, 미쓰비 시레이온, 테이진 등 일본의 소재 관련 업체 3사가 점유하고 있다. 그중 도레이는 1만 7,900톤의 연산 능력으로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이 분야 세계 1위 업체다. 보잉 787에 들어가는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의 100%를 납품하고 있을 정도로 기술력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도레이는 국내에도 '도레이 첨단소재'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2011년 6월 630억 원을 투자해 경북 구미에 제조공장을 세웠고, 올해부터 연 2,200톤 규모로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1호 라인에 이어 2,500톤 규모의 탄소섬유 2라인도 착공에 들어갔으며, 2014년까지 4,700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도레이의 복합재료사업본부장 오오니시 모리유키 전무는 "기존의 항공, 자동차는 물론 우주항공 등 신시장 개척을 통해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견지해 나갈 것"이라고 사업 전략을 밝혔다.
해외 업체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 시장에 국내 소재 관련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를 통해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태광산업과 효성이 그 선두에 섰다. 이들은 탄소섬유 수요 전량(약 2,400톤)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상황에서 기술 개발과 대규모 시설 투자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는 패스트 팔로잉(Fast-Following) 전략을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곳은 태광산업(대표 심재혁 부회장)이다. 태광산업은 지난해 3월 울산공장에서 국내 최초로 산업용 탄소섬유의 상업적 생산을 개시했다.
1967년 아크릴섬유 생산을 시작한 후 40여 년간 꾸준히 독자 기술 개발을 추진해 이뤄낸 성과다. 아크릴 섬유에서 프리커서(탄소섬유의 전 단계 생산물질), 최종 완제품까지 전 공정의 수직계열화(Vertical Integration)를 이뤄냈다는 것이 이 회사의 강점이다. 최초로 생산를 성공한 만큼 어떤 곳에 쓰였는지가 궁금했다. 태광산업 관계자는 "현재는 골프클럽, 테니스 라켓 등 스포츠 레저 수요를 중심으로 매출이 발생하고 있지만, 향후 전기전자, 항공, 자동차 등으로 공급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현재 연간 1,500톤 규모의 생산량을 향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며, "연구개발에 관한 투자를 늘려 가격 경쟁력도 확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효성(대표 이상운 부회장) 역시 독자 기술로 만든 중성능 탄소섬유를 올해부터 생산할 계획이다. 올 1분기내 생산 시작을 목표로, 2,500억 원을 투자해 전북 전주시에 연산 2,000톤 규모의 탄소섬유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향후 2020년까지 총 1조2,000억 원을 투자해 생산량을 1만4,000톤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상운 효성 부회장은 "품질 및 원가 경쟁력이 우수한 탄소섬유 개발에 역량을 집중해 2020년까지 글로벌 톱 클래스 수준의 업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처럼 각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탄소섬유 개발에 나서는 이유는 높은 부가가치 창출효과 때문이다. 탄소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석유 1kg을 생산해서 얻는 부가가치는 970원인 반면, PAN(아크릴)섬유 1kg은 2,293원(2.4배), 탄소섬유는 2만2,400원(23.1배)에 달한다. 항공기 동체에 사용될 경우엔 무려 22만4,000원(231배)까지 높아진다. 원료를 수입한다고 해도, 이를 가공하는 기술력에 따라 수백 배의 부가가치 창출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정부도 이 같은 탄소섬유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지하고, 관련 지원책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지식경제부는 작년 11월 15일 'C(탄소)-산업 발전 포럼'을 개최하고, 미래 성장성이 큰 탄소섬유 등 6개 탄소소재를 선정해 기술개발과 산업화를 집중 지원할 계획임을 밝혔다.
지식경제부 철강화학과 문동민 과장은 "예비 타당성 조사를 거쳐 당장 내년부터 R&D인력 확충과 관련 기업지원 등 C-산업 융합포럼에 예산이 집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기만 주력산업정책관은 "2020년 C-산업 관련 전체 시장은 당초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2,00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라며 "각종 지원을 통해 글로벌 수준의 C-기업 5개사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탄소섬유산업과 관련된 장밋빛 전망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그 대전제로서 간과해선 안 되는 한 가지 이슈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바로 비싼 원가 문제의 해결이다. 현재 탄소섬유의 생산원가는 kg당 20~25달러 수준이다. 국내 수입가는 4만 원 정도다. 현재 생산되는 산업용 강판이 톤당 100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20배 이상 비싼 셈이다. 효성의 한광석 상무는 "탄소섬유가 금속재료를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가격'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지대 김명수 교수도 "대략 kg당 1만5,000원 이하가 되어야 기대했던 시장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며 조심스런 입장을 나타냈다.
품질 향상은 특히 국내 업체들에게 닥친 발등의 불이다. 현재 국내 탄소섬유 관련 기술 수준은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약 60~70%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된다(한국 탄소협회 기준). R&D인력 역시 800여 명에 불과해, 2만 명에 달하는 일본의 4%에 불과하다. 이는 부가가치 창출력의 차이로 직결되고 있다. 작년 국내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탄소섬유 제품은 골프클럽, 낚싯대, 테니스 라켓 등 스포츠 레저용품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들 분야의 수요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가들은 보다 높은 기술력을 확보해 하루 속히 자동차, 항공기 등 초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시장에 진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소재산업이 가지는 특성상 선도 업체가 한 번 완제품 생산업체와의 관계를 설정하면 후발 업체들의 입지는 현저히 좁아진다. 실제로 일본 업체들의 경우 이미 무서운 속도로 자동차, 항공기 등 B2C 완제품 업체들과 제휴 관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도레이는 2011년 6월 독일의 다임러사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작년부터 메르세데스 벤츠 SLS AMG 등 일부 최고급 차종에 사용되는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테이진 역시 GM과 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초 미국에 개발 거점을 개설해 탄소섬유를 사용한 자동차 부재를 공동개발 및 생산할 예정이다. 미쓰비시레이온은 BMW가 올해부터 생산에 돌입하는 전기차 i3에 사용될 탄소섬유 원료를 이미 공급하고 있다.
항공기용 탄소섬유는 도레이가 독점하고 있다. 도레이는 기존 보잉과의 계약은 물론, 2010년 5월 에어버스와도 장기공급기본계약을 체결해 A380 등 최신기종에 고성능 탄소섬유 공급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효성의 한광석 상무는 "항공용 및 자동차용은 품질 인증 및 개발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며 "업계 후발 주자로서 (어려움은 많지만), 고강도, 고탄성 제품 개발로 품질경쟁력을 조기에 확보해 해외 유수 기업과 경쟁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홍석우 지식경제부장관은 "탄소 관련 산업은 '척추산업' 또는 '줄기세포 산업'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타 산업 분야와의 융합에 의해 무한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탄소섬유가 철을 대체할 새로운 '산업의 쌀'로서 자리매김할 날도 멀지 않은 듯 보인다. 국내 업체들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석유 1kg을 생산해서 얻는 부가가치는 970원인 반면, 탄소섬유는 2만2,400원에 달한다. 이것이 항공기 동체에 사용될 경우 무려 22만4,000원까지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