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년 콜럼버스가 쓴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의 한 구절이다. 황금, 다시 말해 부(富)에 대한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사로잡는 욕망의 결정체였던 셈이다. 이 점에서 16세기에 존재했다고 알려지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는 꿈에 그리던 이상향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엘도라도는 실재했을까.
박수옥 과학칼럼니스트 sooook49@naver.com
지난 2010년 1월 전 세계 고고학계가 사뭇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유명 고고학저널 '앤티쿼티(Antiquity)'에 실린 논문이 그 진원지였다. 바로 아마존강 상류 볼리비아와 브라질의 국경 인근에서 거대한 규모의 고대 도시 유적이 확인됐다는 논문이었다. 약 6만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도시는 1999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위성사진 기술이 발달한 10여년 후에야 비로소 그 전체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위성사진 판독 결과는 놀라웠다. 약 250㎞에 이르는 드넓은 밀림에 원과 사각형, 그리고 각종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들이 도로, 수로, 울타리 등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구조물만 300여개에 달한다. 학계에서는 정교한 건축술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방불케 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도시 유적이 세간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방대한 규모나 정교한 건축술이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몇몇 학자들이 이곳을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일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은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무수한 탐험가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아마존 부근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누구도 찾지 못했던 전설 속의 이상향 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엘도라도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하기 300년 전인 서기 1200년경에 건설됐다. 이후 수천 년간 권세를 누리다가 15~16세기경 유럽의 침략자들이 옮긴 전염병 때문에 몰락했다고 한다.
물론 추정은 추정일 뿐 이번에 발견된 도시 유적과 엘도라도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하려면 심도 깊은 과학적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연구팀은 그 규모에 힘입어 지금까지 이 유적에서 발굴한 것보다 10배 이상 많은 추가 발굴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구가 완료될 즈음 과학자들은 어떤 답을 얻게 될까. 영화에서처럼 온갖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비밀의 방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페루의 황금빛
아마존 밀림 어딘가에 있다고 알려진 황금의 땅 엘도라도. 엘도라도의 전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6세기 그 같은 전설에 매료된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 등의 유럽 제국 탐험가들이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수차례 원정에 나섰다.
신대륙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10년 중앙아메리카 최남단 파나마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는 굉장한 소문이 나돌았다. 배를 타고 남쪽으로 얼마간 이동하면 엘도라도라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어에서 '엘(El)'은 정관사, '도라도(Dorado)'는 '황금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제국의 눈과 귀는 아마존의 원류부(源流部)에 해당하는 안데스 지방으로 쏠렸다. 특히 그곳에 터를 닦은 잉카제국는 몇몇 탐험가들의 정찰(?)을 통해 '황금제국'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이렇게 황금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안데스 지방으로 향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스파냐의 유명한 식민지 정복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다. 잘 알려졌다시피 피사로는 200여명의 군사들과 함께 잉카의 수도 쿠스코(페루 남부의 고원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잉카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가 페루 원정을 떠난 것은 1531년. 잉카제국의 왕을 포로로 잡고 원주민을 고문하는 등 갖가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한 그는 그곳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원주민들이 지니고 있던 상당한 금과 보석을 약탈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잉카제국은 황금제국이라는 별칭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곳이었다. 고대문명 탐사가 이종호 박사의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에 의하면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있던 신전의 방들은 벽에 금이나 은 장식이 박혀 있었고 방 안에는 금으로 만든 황제의 동상도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화려했던지 한 에스파냐 정복자는 신전 전체가 그 벽에서 나오는 황금빛으로 빛났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덧붙여 1530년대의 페루는 에스파냐의 최대 금 공급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 제카리아 시친은 저서 '엘도라도, 혹은 사라진 신의 왕국들'에서 이렇게 밝혔다.
"당대의 역사가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의 '페루연대기'에는 에스파냐가 잉카제국을 정복한 뒤 해마다 1만5,000아로바의 금과 5만 아로바의 은을 착취해갔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금 170톤과 은 567톤에 해당되는 양이다."
잉카제국의 원주민들이 그 많은 황금을 어디에서 구해왔던 걸까.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피사로를 비롯한 정복자들의 갖은 압박에도 단지 '신들'이라는 종교적인 대답만 반복했다고 한다.
엘도라도를 찾지는 못했지만 황금 열풍은 그칠 줄 몰랐다. 그 무렵 잉카 원주민들이 다량의 황금을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숨겼다는 설, 피사로가 엘도라도를 발견하고도 그 사실을 감췄다는 설 등이 나돌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소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황금 탐험'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 황금에 대한 에스파냐인들의 열망과 광기를 짐작케 하는 사례가 하나 있다. 1559년 잉카제국으로 향한 에스파냐의 귀족 돈 페드로 데 우르수아와 그의 부하 아귀레의 사건이 그것이다. 아귀레는 엘도라도에 대한 강한 정복욕에 사로잡혀서 반란을 일으키고 우르수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배고픔과 질병, 식인종들의 습격 속에서 작은 뗏목 하나로 버티며 항해를 이어간다. 이는 1972년작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도 잘 표현돼 있다.
엘도라도 러시
엘도라도는 그 실재 여부를 떠나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개척에 직간접적으로 차용됐으며,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유린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구아타비타 호수와 황금인간
엘도라도와 관련해 일부 사람들은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의 보고타 고원에 있는 구아타비타 호수(Lake Guatavita)를 그 실체로 지목한다. 이 같은 믿음 역시 기본적으로 소문에서 기인된 것이지만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구아타비타 호수에는 황금 지붕이 늘어서 있는 마노아라는 거리가 있으며, 전신에 금가루를 칠한 왕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접한 에스파냐인들은 신비스런 그 왕을 '엘도라도-황금인간'이라고 불렀다. 한번 들으면 누구도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호수 근처에 살았던 치브차족은 당대의 여느 부족들과 다를 바 없이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의식이 상당히 독특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여러 문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치브차족은 제사 때마다 추장의 몸에 금가루를 칠한 후 각종 보석을 배에 잔뜩 싣고 호수 중앙으로 나가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때 배에 올라탄 제사장이 보석을 호수에 던지면 추장도 호수로 뛰어들었다는 것.
이로 미뤄보면 구아타비타 호수가 전설의 엘도라도라는 소문은 치브차족의 독특한 제사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들의 제사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황금인간'이 '황금의 땅'으로 변모했을 개연성이 높다. '카더라 통신'은 늘 그런 식이니 말이다.
아무튼 귀가 솔깃해진 유럽의 여러 탐험가들이 구아타비타 호수를 향해 남아메리카로 건너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스파냐 그라나다 출신의 곤잘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 1536년 800여명의 군사와 인부를 이끌고 콜롬비아의 보고타 고원으로 향한 그는 1년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도착 당시의 일행은 160여명으로 줄어있었지만 치브차족을 정벌하면서 적지 않은 양의 금과 보석을 약탈했다.
피사로와 마찬가지로 케사다 역시 엘도라도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터라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구아타비타 호수 주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온몸에 금가루를 걸쳤다는 황금인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발 2,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호수 주변에는 원주민들의 촌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엘도라도에 대한 집착이 여기서 멈췄을 리 없다. 1580년 에스파냐의 세풀베다라는 탐험가는 엘도라도를 찾을 욕심에 구아타비타 호수의 물을 모두 빼내려는 엄청난 일을 자행했다. 8,000여명의 원주민을 동원해 호수 벽을 뚫어서 배수로를 만들었는데 수심이 낮아진 호수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에메랄드와 황금 장식품이 몇 가지 발견됐으나 배수로가 붕괴되면서 더 이상의 작업을 이어가지는 못했다고.
그가 발견했다는 황금은 어쩌면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제사장이 호수에 던진 제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만큼 구아타비타 호수를 엘도라도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물의가 있지만 호수를 발굴 시도는 얼마간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세기 이후 이곳은 다시금 엘도라도 전설의 진원지로 주목받았다. 1912년 영국의 한 기업은 최신 기계를 동원해 호수 밑바닥을 탐색하기도 했다. 당연히(?)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러한 일들이 자꾸 반복되자 1965년 콜롬비아 정부는 구아타비타 호수를 보호하기 위해 채굴 금지령까지 내렸다.
황금 산
엘도라도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라면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과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도시가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며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제2의 황금향
잉카제국의 영토에서 여러 차례 실패를 맛본 제국의 탐험가들은 급기야 표적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지목된 곳이 남아메리카의 기아나 고원이다. 당시 그곳은 아직 에스파냐인들의 손이 완전히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기아나에 주목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의 군인이자 시인이었던 월터 롤리. 그는 앞서 탐험을 했던 에스파냐인들의 정보를 수집한 다음, 현재의 베네수엘라 남동부에 위치한 기아나 일대를 샅샅이 탐색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아나의 발견'이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책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기아나 제국은 페루의 어떤 곳보다 황금이 풍족하다. 수도 마노아를 방문한 에스파냐인들에 의하면 이 도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황제의 식기와 테이블이 모두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
결론적으로 그의 원정도 실패로 귀결됐다.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원정 도중 아들까지 잃은 그는 슬픔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몇 년 뒤 부하들이 에스파냐령에서 난폭한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처형됐다.
여기서 문제는 그가 남긴 기아나에 대한 기록이 워낙 과장이 많아 역사적 신빙성이 거의 없다는 것. 그래서 실제로 기아나 제국에 얼마나 많은 금이 있었는지처럼 기본적인 사항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경우 뜻밖에도 지팡구(일본)를 황금의 땅으로 지목했다.
지팡구는 이탈리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한 황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섬이다.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한동안 중국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옮겼고, 그중에 일본에 대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항주에서 2,400㎞ 가량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지팡구에는 물질이 풍부한데, 특히 황금이 너무 많아서 궁궐은 물론이고 길 여기저기에 지천으로 황금이 널려있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콜럼버스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인들의 탐험욕구를 자극했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단어는 없다지만 혹여 콜럼버스가 지팡구, 즉 일본에 당도했다면 어땠을까.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일본을 엘도라도라 볼 수 없으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엘도라도에 관한 전설은 수없이 많다. 그에 홀린 듯 제국의 탐험가들은 지구 구석구석으로 탐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누구도 엘도라도를 찾지 못했으며, 엘도라도가 정말 실재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어쩌면 엘도라도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다만 확실한 사실은 엘도라도 전설이 여러 제국의 식민지 영토 확장에 교묘히 차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유린하는 수단이 됐다. 콜럼버스만 해도 원주민을 살육·강간했으며 처벌의 수단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자르거나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모든 역사를 돌이켜 보면 콜럼버스의 말처럼 황금은 정말 놀라운 물건이다. 재화로서의 가치라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무수한 사람들이 미지의 땅을 향해 목숨을 건 탐사에 나서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사실이야말로 엘도라도에 버금가는 미스터리가 아닐까 싶다.
1580년 에스파냐의 세풀베다라는 탐험가는 엘도라도를 찾을 욕심에 구아타비타 호수의 물을 모두 빼내려는 엄청난 일을 자행하기도 했다.
잉카 (Inca) 15~16세기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을 지배한 고대 제국. 영토가 지금의 콜롬비아와 잉카 (Inca) 페루, 에콰도르 등지에 넓게 걸쳐 있었다.
아로바 (aroba) 용량 및 중량 단위. 1아로바는 11.502㎏.
지팡구 (Cipangu) 마르코 폴로가 일본을 가리킨 말. 당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일본국(日本國)이라 쓰고, '리쁜꾸'라고 발음했던 것을 마르코폴로가 이탈리아어로 'Japonku'로 표기하며 유래된 명칭이다.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서 남하한 에스파냐 원정대는 1935년 페루에 도착한다. 이후 그들은 현재의 페루 수도인 리마를 근거지로 잉카 전역을 통치했다. 말하자면 리마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자국과의 물자수송과 연락을 원활히 하고자 전략적으로 건설한 도시였다.
지금도 리마에는 에스파냐 지배 당시의 건축물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리마 대성당. 식민 총독이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고 한다.
사생아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한 피사로는 용병 생활을 마친 뒤 인생 역전을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와 파나마를 건설했다. 이후 잉카제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페루에까지 손을 뻗친 인물이다. 천민 출신이지만 막강한 리더십을 발휘, 식민지 건설을 통해 큰 부를 거머쥔 그는 황금을 놓고 갈등을 빚던 동료와의 싸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자신이 주춧돌을 놓은 리마 대성당에 안치됐다.
황금의 땅을 논할 때는 아즈텍 제국을 빼놓을 수 없다. 11세기경 지금의 멕시코 지방에 발달한 아즈텍 제국은 16세기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파괴됐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는 에르난 코르테스. 16세기 그는 황금으로 가득 찬 아즈텍 제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황금 궁전에서 생활하는 아즈텍의 왕 목테수마에 대한 얘기가 제국 전체에 떠들썩하게 퍼져있었던 것.
이에 코르테스는 1519년 문명의 절정을 구가하던 아즈텍의 수도 테노츠티틀란을 침략했고, 2년만인 1521년 아즈텍은 멸망에 이른다.
아즈텍을 정복한 코르테스 일행은 여느 정복자들처럼 식민지에서의 무자비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순진하고 신심이 깊었던 아즈텍 사람들은 코르테스 일행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들을 경계하기는커녕 도리어 환대했다고. 목테수마 왕과 신하들은 보석을 가득 실은 수레를 이끌고 코르테스 일행을 직접 영접했으며, 정복자 일당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까지 그 같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